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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 본문 앞에는 전문(前文)이 있다. 헌법학자들은 이 전문이 본문의 각 조항을 지배하는 근본원리로서, 헌법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헌법의 헌법’이라고 본다. 그래서 헌법 전문은 당연히 헌법규범의 단계적 구조 중에서 본문에 우선하는 최상위의 근본규범이 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에는 곧이어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이 나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부정선거로 헌법을 유린하고 측근들의 부정축재를 용인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 시민혁명이 4·19혁명이다. 이리하여 4·19 시민혁명의 이념은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계승해 가야 할 이념이 된다.

지난 주말 5차 촛불집회는 서울 광화문에 150만명, 전국적으로는 19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였고, 전 세계에 비폭력·평화집회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광장은 10대부터 70대 이상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로 빼곡히 채워졌지만,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요구는 단 하나, ‘대통령 즉각 퇴진’으로 모아졌다. 퇴진 전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4%로 추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 그 시각에 집이나 직장에 있던 국민들의 마음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민적 신임을 이제 거두어들인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26일 제5차 촛불집회에서 처음으로 행진이 허용된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 모인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당 일부에서는 “현시점에서 대통령 하야는 헌정 중단, 헌정 파괴”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퇴진은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절차와 방법이 아니므로 ‘헌정 중단’이나 ‘헌정 파괴’를 낳을 것이라며, 대통령 퇴진 이후의 정국에 대해 불안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국민들에게 불신임당한 대통령에 의해 헌법에 따른 국정 수행이 중단된 ‘헌정 중단’의 상황이다. 주권자인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 정국 수습을 통해 국정 공백 상태를 극복하며 60일 이내의 선거를 통해 5년 임기의 새 대통령을 뽑아 민주 헌정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헌정 회복’이고 ‘헌법 수호’이다.

대통령의 중도 ‘퇴진’은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전혀 불안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헌법 제68조 제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궐위’란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탄핵결정으로 파면된 경우뿐만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 ‘퇴진’한 경우를 포함한다. 헌법은 전문의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을 통해 국민적 신임을 잃은 대통령은 임기 중에도 중도 퇴진할 수 있음을 규정함과 동시에, 불의의 정권이 퇴진하고 난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대통령에게 헌법 제70조가 부여한 대통령 5년 임기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부여한 신임을 스스로 저버린 대통령은 임기 중간에도 주권자인 국민들의 당당한 퇴진 요구에 의해 퇴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민들이 직접 불의의 정권에 책임을 묻는, 헌법이 정한 절차와 방식이다. 헌법이 정한 이러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질서 있게 이 헌정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와 안정’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오히려 위험스러운 것은 대통령의 퇴진 거부로 ‘국정 공백’과 ‘헌정 중단’ 상황이 길어지는 일이다. 가계부채가 늘어나 1300조원에 육박하고 내수와 수출이 모두 얼어붙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외교·국방에도 중요한 현안들이 쌓이고 있다. 대통령의 퇴진 결단이 시급한 이유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치권이 가장 치중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진상규명의 노력이다. 검찰과 특검의 성역 없는 수사와 함께 국회의 국정조사와 탄핵소추가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진상규명이 병행되면 주권자인 국민들은 이를 통해 규명된 진상들에 근거해 계속해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국민이 성공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광화문에 부모 손을 잡고 나온 많은 아이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승리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 후 이제 어떤 대한민국으로 갈 것인가를 국민과 정치권이 치열하게 논의하면 된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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