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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는 소설 <단식 광대>에서 한때 유행했던 단식 공연에 대해 묘사한다. 대중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갔기에 굶주린 광대의 공연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굶주림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북한에 스위스 정부가 최근 500만달러(약 59억원)를 지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 국제사회의 대북 지원 중 가장 큰 규모다. 한국이 갈팡질팡할 때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은 인도적 지원의 원칙을 지키면서 묵묵히 북한을 지원해왔다.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EU)이 2006년부터 중단 없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정치와 무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정세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이슈에 상관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 북한 주민을 돕는 데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린이, 임산부, 노인, 장애인 등 실질적 수혜자인 취약계층을 중점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사업 목표를 선정할 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수치를 근간으로 하며, 국제기구와 함께 북한 내 수요와 우선순위를 분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퍼주기 논란’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그동안 사업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EU는 평양에 사무소를 둔 자국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식량, 영양, 보건, 식수 분야의 국제개발 전문가들이 사업을 진행해 왔다. 정기적이고 전문적인 모니터링과 평가를 통해 사업의 질을 높여 왔기에 효과는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세번 째로, 금세기 가장 어려운 제재 상황에서도 국제사회가 합의한 규칙을 지키며 인도적 지원을 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제재 예외를 유엔 제재위원회에 요청하기 위해서는 제반 시스템과 행정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국이 역량이 없어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지 못한다고는 볼 수 없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하면서 전문성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북한에 식량 위기가 왔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기아 위험 경고는 수년 전부터 있었다. 유엔에서도 ‘잊혀진 위기 국가(Forgotten Crisis Country)’로 북한을 선정했을 정도다. 컨선월드와이드와 세계기아원조가 작년 10월 발표한 ‘2018년 세계기아지수’에서 북한의 기아 위험 수준은 11위였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약 40%가 만성 영양실조의 지표인 ‘발육 부진’에 해당했다. 나이지리아(17위)와 모잠비크(18위)보다 심각했다. 기아가 서서히 북한을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이달 초 북한 식량 생산이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가뭄 탓에 극심한 보릿고개를 마주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외신은 북한의 일일 배급량이 570g에서 300g으로 줄었다고 알렸다. 주민들이 300g짜리 햇반 한 개를 긴 하루에 나누어 먹고 있는 셈이다.
모든 데이터와 수치가 최악의 식량사정과 영양 위기를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북한의 식량 상황이 정말 나쁜지, 지원해야 하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TV나 동영상에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되어버린 ‘먹방’은 이제 영어로도 ‘Mukbang’이라고 할 정도이니, 한국 사회에서 굶주림은 가장 재미없는 콘텐츠일 게다. 동시대, 같은 시간에 굶주린 배를 움켜 잡고 바닥을 기며 스스로 소멸되는 느낌을 갖는 사람들에게 줄 관심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인도적 지원을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여론에 기대어 결정하려고 한다.
인도주의는 북한이라는 이슈를 넘어 인류의 공존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새겨야 할 가치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굶주림에 쓰러져 있는 북한에 몇 년째 도와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유럽과 국제사회는 묵묵히 북한을 돕고 있다. 당신이라면 누구의 손을 잡겠는가. 한국의 인도적 지원은 이미 늦었다. 더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준모 컨선월드와이드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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