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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텃밭은 참 이쁘다. 저마다의 모양, 색깔로 자라나는 것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다. 상추와 치커리, 겨자 같은 갖가지 쌈채소들은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쌈을 싸든 샐러드를 만들든 맛나다. 건강한 맛은 덤이다. 눈곱만 한 씨앗의 열무는 어느새 열무김치를 담글 만하고, 당근도 바질도 한 뼘 크기로 자리 잡았다. 완두콩과 감자도 영글어간다. 겨울을 이겨낸 부추는 잘라 먹어도 또 자라 이웃과 나눈다.

작물들이 잘 자라고, 싱싱한 먹거리가 많아지고, 마트에서 산 쌈채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맛나다고만 해서 텃밭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흙과 햇빛과 바람과 물로 씩씩하게 자라나는 그 생명의 신비로움이 아름다움의 고갱이다. 생명의 신비로움은 오감을 자극하고, 오감의 부활은 삶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땀 흘린 만큼 거둔다’ ‘땅이 스승’이라는 평범한 말에 담긴 수백가지의 뜻을 새삼 깨우친다. 씨앗을 뿌린 나 스스로가 기껍다. 그래서 텃밭은 더 이쁘다.

이맘때 땅은 농부의 손길 속에 생명의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남녘 곳곳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다. 이미 제주도의 양배추를 시작으로 해남의 겨울배추, 무안의 양파를 비롯해 대파·주키니호박 같은 농작물들이 밭에서 갈아엎어지고 있다. 월동 농사가 잘됐다고 기뻐해야 마땅한데 값이 폭락, 자식처럼 애써 키운 농작물을 농부들은 땅에 묻어버린다. 그 농부의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산지폐기, 시장격리라는 이름 아래 폐기된 농작물이 벌써 수만t이다. 해마다 반복된다. 잔인한 일이다. 정부의 제대로 된 농정정책이 없어서다.

산지폐기 소식을 듣는 이맘때면 그가 생각난다. 누구보다 땀 흘려 일하지만 먹고살기 팍팍한 도시의 소외된 약자들을 만날 때도, 공동체 파괴로 각자도생하며 배려와 나눔이 없는 한국 사회의 일면을 볼 때도, 생태환경 파괴에 따른 공포스러운 현상이 나타날 때도 그가 떠오른다.

무위당(无爲堂) 장일순(1928~1994). 무위당은 생명의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생태환경 속에서 사람과 만물이 공존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한 밥상을 맞으며 서로 연대해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꿈꿨다. 그리고 이 땅과 어울리는 생명·생태사상을 정립하고 그 위에서 몸소 실천했다.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공동체 정신에 기반한 지역민의 자립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협동(조합)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생산자와 소비자, 도시와 농촌 사람 모두를 위한 농산물 직거래인 한살림 운동도 펼쳤다.

협동조합운동·생명운동의 선구자만이 아니다. 1970년대엔 민주화운동의 한 구심점이었다.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민주주의를 꿈꾸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원주에 모여들었다. ‘70년대는 원주, 80년대는 광주’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또 ‘나락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본’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되새김질할수록 깊은 뜻이 우러나는 서화작품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하다. ‘좁쌀 한 알’이라는 ‘일속자(一粟子)’란 호에서 보듯 자신을 한없이 낮춰 세상 모든 사람, 만물을 하느님으로 섬긴 수도자였다. 이 시대에 그리운 큰 어른이자 스승이 무위당이다. 지난 22일은 무위당의 25주기였다. 3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일도 생겼다. 무위당의 삶과 사상을 담은 <장일순 평전>(두레)이 마침내 출간된 것이다. 그동안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좁쌀 한 알, 장일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등의 책은 있었으나 평전은 처음이다. ‘무위당의 아름다운 삶’이란 부제의 평전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무위당사람들’의 감수로 펴냈다. 무위당사람들은 무위당의 유지를 이어 공동체적 삶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현재 전국 12개 무위당학교와 연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삼웅 전 관장은 “무위당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따르는 사람이 줄을 선다. 왜일까?”라며 “지식인으로서 정직함, 불의에 맞선 장렬함,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과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라고 후기를 남겼다. 무위당과 인연 깊은 목판화가 이철수는 “무위당을 잘 모르던 이들은 <장일순 평전>으로 무위당의 삶과 사상의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 지속 가능한 문명,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람과 뭇 생명들이 모두 함께 잘 살아가는 상생과 공존, 공동체적 삶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시대를 앞섰던 무위당의 사상과 삶을 살펴볼 만하다. 무위당의 지혜가 담긴 이 평전이 더 널리 온누리에 퍼지기를 기대한다.

<도재기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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