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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급 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지만 여기서 치료할 수 없는 중환자들의 경우 그 치료가 가능한 다른 상급 종합병원으로 전원을 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언제나 바로 수속이 진행되지 않아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수라장 같은 응급실 복도에 누워 병실이 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에 웬만한 상급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희귀난치 질환자가 정말 이렇게 많은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보건복지부가 또 ‘의료전달체계 개선 대책’을 발표했는데 그 핵심은 상급 종합병원이 경증 환자를 진료하는 경우 지원금을 주지 않겠다는 경증 환자 진료에 대한 페널티다. 불행히도 현장의 의료인들은 이미 만신창이인 우리나라의 의료전달체계가 이런 제도로 개선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번에 발표한 내용도 해마다 되풀이돼온 것에 지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핵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경증 질환의 대표 격인 고혈압은 1차 의료기관에서 치료해야 하지만 상급 종합병원 외래진료실은 항상 고혈압 환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고혈압을 분류하는 Ⅰ코드는 26개에 달하는데 이 중 3개만이 경증이어서 진단 코드의 숫자 하나만 바꾸면 쉽게 경증이 아닌 환자로 만들 수 있다. 상급 종합병원들은 이런 업코딩으로 페널티쯤은 우습게 따돌린다. 경증 질환 환자를 1차 의료기관으로 보내는 것을 장려하는 회송 시스템은 실시된 지 10년이 넘지만 작동을 하지 않는다. 병원들이 환자를 보낼 동기 유발 요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진료의 질과 상관없이 환자를 몇 명 보는지가 명의의 척도로 간주되고 병원에서는 환자 수를 의사의 수입과 연동시킨다. 심지어 적절한 진료시간과 환자 수를 고수하는 의사가 불이익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회송의뢰서를 쓰면 보상해주겠다는 정책을 내걸었으나 실효성은 전무하다. 회송의뢰서 수입보다는 환자들을 계속 잡아두고 각종 검사로 버는 수입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우선은 의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형 병원은 의료기기나 시설이 좋기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 작은 병원에 가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질환의 거의 대부분은 별다른 검사장비 없이 의사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병원 쏠림의 또 하나의 원인인 1차 의료기관 불신을 해소하는 과감한 정책도 필요하다. 즉 1차 진료의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그래서 환자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관이 되도록 지원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1차 의료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환자 교육 및 상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의료인의 시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우리나라 상대가치 체계 안에서는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고, 그 결과 현재와 같이 검사에 매몰된 기형적 의료가 탄생했다. 1차 진료의는 자신의 지식과 전문성이 아닌 거금을 들인 인테리어에 경영을 의존해야 하고 이윤을 얻기 위해 근거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치료들을 시행하면서 신뢰가 무너지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한 고이윤 의료행위만이 살아남는 현실이 더 심화되기 전에 보건당국은 더 실효성 있는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 보건당국에 의료가 공공재라는 개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상급 종합병원이 지금처럼 환자 머릿수에 의한 성과에 매몰되는 경영방침을 고칠 수 있도록 간섭하고 외래진료 환자 수를 엄격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다. 매우 어려운 일인데 환자들은 지금과 같은 닥터쇼핑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고 정치인들은 표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병원들은 당장 경영권 간섭에 의한 사유재산 침해를 운운할 것이고 그 저항의 정도는 한유총 사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의료가 첨단 장비나 시설에 빌붙은 서비스 정도로 추락하고 의료의 인간적 인터페이스가 말살되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변에 믿고 환자를 맡길 의사가 점점 적어진다는 탄식이 의사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은 큰 비극이다.

<김현아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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