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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꼰대’<kkondae>

opinionX 2019. 9. 26. 11:11

청말의 사상가 옌푸는 다윈의 ‘진화론’을 ‘천연론(天演論)’으로 번역해 중국에 알렸다. ‘천연’은 ‘하늘이 흘러가며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연론’은 일본의 번역어 ‘진화론’에 밀려났다. 희랍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처음 ‘애지학(愛智學)’으로 번역됐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후 일본 학자가 ‘희철학(希哲學)’으로 옮기면서 ‘철학’으로 굳어졌다. 

언어는 사물이나 형상을 담는 그릇이다. ‘일물일어’라지만, 하나의 사물을 한 어휘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외국어를 자국의 용어로 바꾸는 일은 더 어렵다. 영어 ‘소사이어티(society)’가 일본에 수입됐을 때 여반(侶伴), 동료, 집회, 교제, 조합 등으로 번역됐다. 100여년이 지나서야 ‘사회’로 정착했다. ‘인디비주얼(individual)’은 처음 본신, 독일자, 일물(一物), 인가(人家) 등으로 옮겼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람 각각’ ‘국민 한 사람’으로 번역하면서 현재의 ‘개인’으로 수렴됐다(야나부 아키라, <번역어 성립 사정>).

번역은 외국어와 자국어의 끊임없는 대화다. 좋은 번역어는 사물의 뜻과 소리를 함께 담는다. 중국어의 법국(法國:프랑스), 덕국(德國:독일), 서전(瑞典:스웨덴)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빙도(氷島:아이슬란드)처럼 의미만 전하는 경우도 있고, 신가파(新加坡:싱가포르)나 맥당로(麥當勞:맥도널드) 등 발음을 중시한 번역어도 있다. 신서란(新西蘭:뉴질랜드)과 성파극(星巴克:스타벅스)은 뜻과 소리를 절충했다. 물론 오늘날 외국어가 넘쳐나는 세계화 시대에는 번역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영국 BBC가 최근 ‘오늘의 단어’로 ‘꼰대(kkondae)’를 선정했다. BBC는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 설명하면서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앞서 갑질(gapjil), 재벌(chaebol)이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꼰대, 갑질, 재벌은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우리말이다. 외국어로 번역 못할 리야 없겠지만, 한국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단어라 그대로 쓰는 것 같다. 우리말의 세계화다. 그런데 찜찜하다. 두레, 아리랑, 시나브로처럼 지천으로 널린 좋은 우리말 놔두고 하필 ‘꼰대’라니.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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