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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대선 유세에서 러스트벨트로 상징되는 자신의 지지층을 겨냥해 계산된 혐오의 레토릭을 전략적으로 활용했고 이러한 논법은 지금도 종종 등장한다. 가령 과거에 비해 경쟁력을 잃은 미국 경제, 특히 중국의 거센 추격 등 외생변수를 여성과 무슬림, 이민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탓으로 전가하고 이들을 위험한 타자로 규정하는 프레임이 그중 하나이다. 이런 극우 포퓰리즘적 정서는 이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한국 수출규제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문제는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아베 총리가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 대해 한국 내 여론 분열을 계산했다는 정황들도 발견된다. 최근 국내의 정치적 갈등이 더욱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논쟁과 비평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 싸움의 언어 역시 최소한의 공유지를 벗어나선 곤란하다. 상대방의 존재를 근원부터 부정하는 치킨게임의 언어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그 언어가 도달하길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어렵다.
한 예로 여당의 야당에 대한 친일 프레임이 현 상황을 타개할 최상의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감정적 민족주의의 언어들이 지지자를 염두에 둔 전략적 화용론의 일부일지라도, 책임 있는 정당의 언어로 여겨지기 어렵다. 이에 대한 야당의 대응 담론이나 언술들은 더욱 문제적이다. 일례로 국가적으로 공감과 연대를 확장해야 하는 위기상황에서 지혜와 힘을 모으고 신중한 해법을 모색하는 대신, 외교안보라인을 포함해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거나 추경 처리에 협조하지 않겠다던 야당 대표의 말은 정치의 패권이나 권력 지향적 속성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대다수 국민 정서상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결과 시민사회의 자발적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여행 보이콧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보다 큰 문제는 언론의 양비론이다. 한때 세계적 경제대국이자 문명화된 국가의 전범으로 여겨지던 일본과 그 정부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엄정한 힘의 논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말이 그중 하나이다. 아베 정부의 ‘내셔널리즘’과 문재인 정부의 ‘극일’ 모두 비이성적이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논조는 또 다른 예이다. 평화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 제9조를 수정해 전쟁이 가능한 이른바 ‘정상국가’로 되돌리려는 역사수정주의자 아베의 경제보복 조치라는 변수와 동북아 질서의 변화에 대한 고려 없이 이를 현 정부의 외교실패로 규정하는 보수언론의 양비론은 위험하다.
특히 관련 사태에 대한 정부 인사들의 대응 담론을 신중치 못한 행위라 문제 삼는 것은 표면적으론 언론의 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을 수행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첨예한 국제질서 속에서 내부의 위기를 외부의 갈등으로 전가해 전쟁 같은 위기상황을 조장하는 아베의 위험천만한 정치공학을 용인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 인사들의 말에 대해 전시동원체제 아래의 애국이냐 이적이냐의 양자대립적 논의로 치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그럴듯해 보이는 지적 또한 계산된 양비론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작은 차이를 봉합하고 큰 뜻에 힘을 모아야 하는 준엄한 시점이다.
<류웅재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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