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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삿포로 고등재판소에서 우익논객 사쿠라이 요시코 등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린 지난 6일, 패소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한 말이다.
재판부는 사쿠라이가 쓴 글로 우에무라의 명예가 훼손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쿠라이가 우에무라 기사의 공정성에 의문을 가질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실망스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1심에 이어 두 번째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이 재판은 단순한 두 언론인 간 다툼이 아니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부끄러운 역사를 파헤친 언론인과 그 역사를 부인하고 다시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려는 일본의 보수 우익 아베 정권과의 ‘역사적’ 싸움이다.
우에무라는 1991년 8월11일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구체적 사례를 기반으로 아사히신문에 보도했다. 그의 기사가 기폭제가 돼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주요 외교현안으로 떠오르고, 1992년 방한한 미야자와 총리의 사죄, 1993년 위안부 강제연행 등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가 발표됐으며,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의 여성 폭력에 대한 결의안 채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06년에 이은 2012년 아베의 집권 후 아사히신문은 과거 역사를 지우려는 보수 우익들의 집중공격 타깃이 됐다. 산케이신문 등의 끈질긴 공격에 2014년 아사히신문은 조선인 여성들의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주요 근거였던 ‘요시다 증언’에 대한 자사 보도에 일부 오보가 있었음을 인정한 데 이어 그 책임을 지고 사장이 사임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우에무라 기자도 공격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그해 2월 슈칸분슌은 “위안부 기사를 날조한 아사히신문 기자가 고베의 대학 교수가 되려 한다”는 기사를 썼다. 우익들의 집요한 협박에 쇼인여자학원대학은 결국 그를 채용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우에무라는 2015년 자신을 ‘날조기자’로 몬 니시오카 스토무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슈칸분슌 등을 도쿄재판소에, 사쿠라이 요시코와 주간 신초 등을 상대로 삿포로재판소에 명예훼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재판은 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아베 정권과의 싸움이었다.
재판부는 우에무라의 청구를 기각했지만, 재판정은 그를 응원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우에무라재판을 지지하는 시민의 모임’을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이 70석 방청석을 빈틈없이 채웠고, 20여명 변호사들로 변호인석이 비좁을 지경이었다. 삿포로에서 활동하는 900여명의 변호사들 중 107명이 우에무라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한국에서 간 ‘우생모’ 회원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임재경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등 언론자유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지난해 10월 재판 방청을 시작으로 ‘우에무라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조직해, 아베 정부와 우익들을 상대로 한 그의 힘겨운 싸움을 응원하러 간 것이다.
과거 역사를 덮고,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른 뒤,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에서 개헌정족수를 확보한다는 게 아베의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판 뒤 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부영 이사장이 “보편적 인권을 무시하고 전쟁범죄를 은폐하는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자격이 있느냐”고 일갈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음달 3일 우에무라 도쿄재판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리고 상고심도 이어질 것이다. 우생모는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 시민들과 함께 이 역사적인 재판을 주시할 것이다.
<지영선 생명의숲 공동대표·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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