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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관련자로서 “요즘 우리 그림동화 참 좋던데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이 된다. “우리 그림책 대단하죠”라고 대답하면서 “그림동화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아요”라고 표현을 고쳐드리곤 한다. 

동화는 어린이가 읽는 문학에 속한다면 그림책은 그림이 서사의 주도권을 갖고 글과 함께 제3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전혀 다른 분야의 현대예술이다. 회화와 문학과 디자인이 어우러져 출판이라는 대량 생산 체제를 통해 생산되므로 누구나 가볍게 한 권씩 소장할 수 있다. 어린이만 읽는 책은 아니지만 어린이가 예술의 매력을 만나는 최초 경로이기도 하다. 그림의 역할이 큰 그림책은 국적을 넘어 독자를 만난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개 부문 수상 장면을 보면서 세계 독자의 사랑을 받는 우리 그림책 작가들을 떠올렸다. 그림책 분야의 아카데미상이라면 1938년부터 시작된 ‘칼데콧(Caldecott) 메달’일 것이다. 2020년 수상작으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담은 그림책 <The Undefeated(철인들)>가 선정되었다. 등장인물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전원이 검은 피부를 가졌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그림책에서도 다양성은 뜨거운 이슈다. 그러나 칼데콧 메달은 여전히 미국 시민권자이거나 미국에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한 작가의 작품만을 고집한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2020년에도 국내 독자는 물론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더 큰 지지를 받는 이수지 작가는 칼데콧의 후보조차 되지 못한다. 최근 평론가들은 뉴욕타임스에 글을 실어 이를 비판하고 국적을 가리지 않는 ‘칼데놋(Caldenott) 메달’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미국에 수출된 우리 작가 이억배의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이 ‘칼데놋 명예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조만간 칼데콧도 비판을 받아들이고 문을 열 것인지 주목된다. 

폐쇄적인 칼데콧 메달에 비해 유연한 유럽의 그림책상에서는 우리 작가의 수상 소식이 꾸준히 들려온다. 올해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도 신인인 안재선 작가가 <삼거리 양복점>으로 오페라 프리마를 수상했고 스웨덴의 피터팬상에서는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과 홍나리 작가의 <아빠 미안해하지 마세요>가 최종후보에 올랐다. 여기서 또 한 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된다. 당사자 백희나 작가는 최근 <구름빵>의 저작권 소송 2심에서 패소했다. 자신의 작품은 물론 그 작품으로 만든 뮤지컬, 속편, 연극, 캐릭터 상품에 대한 어떤 참여의 권리도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만약 백희나 작가가 스웨덴에서 <구름빵>으로 상을 받게 된다면 누가 그 상을 받으러 가야 할까? 그림책이라는 콘텐츠의 잠재력은 취하고 싶고 작가의 권리는 거두고 싶은 사회가 수상의 영예를 함께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일까. 

영화가 환호를 받는 중에도 조여정, 송강호, 이정은 등의 배우는 ‘기생충의 배우들’로 집단 호명되기도 했다는 씁쓸한 말을 들었다. 이는 우리 그림책의 현실과 닮았다. 기업의 후원도 없이 정부에 기본적 지원을 요청해가면서 분투하는 그림책 작가들은 ‘그림동화 작가님들’ 또는 ‘아동분야 작가님들’이라는 어이없는 통칭으로 불리는 일이 적지 않다. <구름빵> 사건이 오랜 외면의 항목이 된 사이에 이상문학상 저작권 양도 문제가 터졌다. 어제도 어느 창작동화상 포스터에서 신인작가의 무기한 저작재산권 귀속을 버젓이 명시한 문구를 읽었다. 우리가 존중하지 않는 창작자를 세계에 자랑할 수는 없다. 깨끗이 기쁘지가 않다. 우리는 이것을 독자의 양심이라고 부른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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