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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이 하나 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일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때이니 기록이 있을 리 없고,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있었지만 없었던 것이 된 일이다. 박종철, 그가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 청사 5층 9호에서 참혹하게 살해되고 나서, 그의 죽음이 한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이 되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영화 <1987>에서 보듯 말이다. 바로 1987년을 고유명사로 만들었던 역사적 고리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다.
1월22일, 그러니까 아직 박종철의 죽음이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던 때, 군부독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던 때, 감히,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 <1987>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때의 대공분실이 어떤 곳이었던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권력을 가진 곳,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것으로 알았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바로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시위에 나선 것이었다. 인원은 30명을 넘었고, 시위대는 모두 여성이었다. 남영동 금성극장 주변 다방과 골목에 숨어있던 그들은, ‘우리가 상주’라는 뜻에서 삼베로 만든 수건을 쓰고 “박종철은 내 아들이다”로 시작되는 성명서를 뿌리며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이 곧 그들을 둘러쌌고, 일부는 연행되고 일부는 주변 골목으로 쫓겨가 연좌시위를 계속했다. 이것이 닷새 전 민가협에 이어 박종철의 이름을 남영동에서 부른 가두 대중 시위였다. 이날 시위는, 지금은 고인이 된 여성운동가 이우정, 박영숙이 앞장섰고, 안상님, 김희선을 비롯한 한국여성단체연합, 교회여성연합 여성들이 함께했다. 시위는 불과 몇십분 만에 진압되었지만, 그들의 용기는, 공포로 얼어붙은 시대를 깨웠고, 6월항쟁의 불을 붙인 불씨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 불씨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6월18일 최루탄추방범국민대회의 도화선이 된 것도 여성들의 시위였다. 그들은 이한열이 쓰러지고 나서 이틀 후, 남대문 삼성본관 앞에서 성공회 성당까지 최루탄을 뚫고 행진하며 죽음의 진압을 거두라고 외쳤고, 국민운동본부에 최루탄추방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누구의 자식도 죽이지 말자고 독재의 또 다른 피해자인 전경들의 총구에 꽃을 꽂기 시작한 것도 여성이었다. 최루탄을 쏘는 총구에 꽂혔던 그 꽃이 사소해 보이는가? 그 꽃은, 이 싸움이 시위대와 전경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과 군부독재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대중에 널리 알린 상징적인 꽃으로, 민주화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계기를 만든 것이다.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대개 여성들이 한 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보지 않는다’. 사소하게 취급하거나 마치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삭제되곤 한다. 수많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 중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여성은 2%가 채 안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러나 삭제되어 보이지 않던 고리를 복원해야 역사라는 거대한 줄이 온전하게 완성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감옥에 있던 이부영이 보낸 쪽지가 명동성당에 전달되기까지는 김정남과 교도관 외에 하나의 고리가 더 있었다. 주부 황숙자와 그의 딸이었다. 그들은 첩보 영화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문건을 전하는 일을 여러 번 수행했다. 그들이 생략된 것은 여성이어서인가? 영화 속 여성은 대부분 주변인이거나 보조자이지만 역사 속 실제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 왜 여성들이 한 일은 삭제되어 보이지 않는 고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고리를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 이것이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며칠 전, 20대 후반에 접어든 한 젊은 여성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어요?” 그 여성에게 대답했다. 여자들은 바로 거기에 함께 있었다고. 그러고 와서 이 글을 쓴다.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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