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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천 년 전 형성된 고산습지의 색다른 풍경에 직접 몸을 적신 영향일까. 서울에 오고서도 대암산 용늪을 다녀온 후유증이 오래갔다. 허벅지에 군불이라도 땐 듯 기분 좋은 부작용이었다. 입산하기도 등산하기도 힘든 곳을 다녀왔다는 생각보다도 늪에 체류한 30여분 동안의 변화무쌍함에 압도된 탓이다. 눈앞의 식물도 식물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출몰을 거듭하는 안개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늙어가는 호기심이 모처럼 작동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림ⓒ이해복
그 와중에 말석에 ‘낑기기로’ 한 <열하일기> 답사가 다가왔다. 여행을 준비하며 자료를 읽는데 이런 대목이 꼭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지극히 미미한 사물들, 이를테면 풀·꽃·새·벌레와 같은 것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지니고 있지.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하늘의 묘한 이치를 엿볼 수 있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지음, 돌베개)
꿈결처럼 다녀온 용늪과 머나먼 타국의 열하를 어디 단순 비교하랴. 하지만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셨다’는 연암을 생각하자니 용늪 데크에서 엎드려 꽃을 찍던 꽃동무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날, 세상과 격리된 용늪에서는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만 뱉을 뿐이었다. 용의 등에 올라앉듯 데크에 엎드려 눈앞을 응시하면 사초과의 야윈 줄기 사이로 흰 꽃들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북방계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산지대에서만 드물게 사는 귀한 기생꽃이었다. 설악산, 지리산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들과는 확연히 크기가 작다는 느낌이었다. 너무 작아서 노안이 찾아온 나에겐 보일 듯 말 듯 하는 기생꽃.
기생꽃이라고 할 때의 기생은 우리가 선뜻 짐작하는, ‘말을 이해하는 꽃’을 뜻한다고도 하는 그 기생이다. 이름이 주는 강렬함도 있지만 잎은 잎대로 또한 꽃은 꽃대로 땅을 짚고 애틋하고도 야무지게 일어선다. 잊으려야 잘 안 잊히는 서늘한 꽃이고 묘한 이치를 엿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꽃. ‘모타리’는 작아도 참 견결하다는 인상을 주는 꽃, 기생꽃.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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