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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답사 가는 길. 238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서울에서 출발했지만 연암은 무려 한 달, 후래자들은 고작 한나절 만에 압록강에 도착했다. 무언가 크게 새치기한 기분이 들었다. 세례받듯 압록강변에서 하룻밤을 자고 책문을 지나 대륙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지 말아야 하듯 벌판이라는 단어 앞에 다른 지역은 얼씬거리면 안된다. 요동벌판이다. 한바탕 울기 좋은 곳의 이정표가 되었던 요양(遼陽)의 백탑은 이제 고층빌딩에 가려 옛 정취가 사라졌다.   

연암을 흉내내 무슨 감정이 일어날까 목구멍 너머를 쥐어짰지만 아무 기미가 없다. 휘황한 불빛 아래 백주만 들이켜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산책 삼아 백탑공원에 가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아침이 있는 삶이었다. 탑돌이, 기공체조 그리고 제기를 차는 중국인들. 몇몇이 어울려 제기를 빌려 함께 놀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제기. 내 발목에 차인 뒤 없는 길을 더듬으며 올랐다가 공중의 기(氣)를 기웃거리고 내려오는 제기를 보는데 연암이 압록강을 건너며 했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자네, 도(道)를 아는가. (…) 서양인은 기하학에서 하나의 획을 분별할 때, 하나의 선이라 말하는 것으로 그 은미함을 드러내지 못할 경우 ‘빛이 있고 없는 사이’(有光無光之際)라고 한다네. 불교에서는 이에 대해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다’(不卽不離)라고 말하지. 그러므로 그 경계(際)에 잘 처신함은 오직 도를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니….”

공중에 붙지도 못하고 발에 닿으려면 그냥 차올리니 떨어지지도 못하는 제기. 한국이 독일을 납작하게 만든 것처럼 축구에서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다. 하지만 제기차기는 하늘과 겨루는 것이니 스스로 그만두는 수밖에 없겠다. 이윽고 공원을 빠져나오는데 새로 보이는 풍경 속에 꽃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백탑 아래 정열적으로 핀 접시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이는 꽃이다. 중국이 원산지이니 더욱 크고 중국답게 빠알간 접시꽃. 연암의 눈길도 분명하게 묻어 있을 백탑과 중국제(製) 접시꽃을 보면서, 제기는 순우리말이라지만, 오늘은 이렇게 적고 싶어졌다. 제기는 際氣! 접시꽃, 아욱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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