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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포츠에는 ‘탱킹(tank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기름이 없으면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처럼, ‘탱킹’은 경기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러 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력보강에 힘을 쏟지 않는다. 성적은 당연히 바닥권이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시작됐다.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유행이다. 몇몇 팀들은 아예 시즌 전 ‘탱킹’ 가능성을 암시한다. “올 시즌, 우리는 성적보다 미래를 고민합니다”라는 말은 ‘탱킹’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위를 떨어뜨린 뒤 신인드래프트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겠다는 계산이다.
신인드래프트는, 특히 북미프로스포츠에서 전력을 강화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고교 혹은 대학 졸업(또는 재학) 선수들을 지명한다. 직전 시즌 성적의 역순으로 선수들을 골라나간다. 프로스포츠 산업의 중요한 가치인 ‘전력 균형’을 위한 장치다. 지난해 못한 팀이 더 좋은 선수를 뽑을 수 있다. 탱킹으로 몇 년 참으면 팀의 주축이 될 만한 선수들을 채울 수 있다.
이상적 이론에 그치지 않는다. 2016년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는 몇 년 동안 탱킹 과정을 거쳤고, 10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17년 휴스턴 역시 중계 시청률 0%라는 오랜 ‘고난의 기간’을 거친 끝에 젊은 선수들의 활약을 묶어 창단 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냈다.
메이저리그는 지난 5일부터 2019시즌 신인드래프트 행사를 열었다. 수많은 회의를 거쳐 고심 끝에 필요한 선수를 차례로 고른다.
오리건 주립대 4학년 루크 하임리히는 미국 대학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이다. 지난해 하임리히는 11승1패로 완벽한 투구를 했다. 평균자책점이 겨우 0.76밖에 되지 않았다. 150㎞를 넘는 강속구를 쉽게 던졌다. 올해에도 15승1패, 평균자책점 2.42를 기록했다.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성적이지만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은 하임리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10대 시절, 6살짜리 조카를 성추행한 혐의로 유죄를 받은 사실이 지난해 여름 알려졌다. 지난해 드래프트에서도 지명받지 못했고, 올해 역시 구단들은 하임리히를 외면했다. 하임리히 측은 “당시 재판까지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유죄를 인정했을 뿐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항변했지만 구단들은 “어쨌든 유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리조나는 2013년 신인드래프트 34라운드 지명 때 코리 한을 지명했다. 한의 지명이 특별했던 것은,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은 미국 청소년 대표로 뽑힐 정도로 유망주였지만 애리조나 주립대 1학년 때 개막전에서 2루 슬라이딩을 하다 크게 다쳐 허리 아래를 쓸 수 없게 됐다. 애리조나는 지명 뒤 그를 선수 대신 스카우트 직원으로 채용했다.
5일 열린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 때 애틀랜타는 1라운드 지명 발표 자리에 코너스빌 고교 포수 루크 테리를 초대했다. 2살 때 병에 걸려 오른팔을 잃은 테리는 왼손만으로 경기하지만 수준급 포수로 평가받는다. 테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애틀랜타의 1라운드 지명선수로 카터 스튜어트를 호명했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다. 탱킹을 통한 드래프트에서도 ‘무조건 승리’ 대신 ‘리그의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2018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 유세가 진행 중이다. 야당의 움직임을 보면 일부러 전력 약화를 노리는 ‘탱킹’이 의심될 정도다. 다만 지금의 ‘탱킹’이 미래의 승리를 위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은 채 “이러다 곧 다 죽는다”는 으름장만 놓는다.
프로스포츠에서 희망 없는 탱킹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오랜 팬들조차 다 떠난 텅 빈 그라운드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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