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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는 그런 음악가였다. 국악이라는 한국인에게조차 낯선 미지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두고두고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든 분. 그뿐 아니라 국악을 전대미문의 전위적인 실험 음악으로 안착시킨 진정한 ‘대가’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지금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황병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경과 인종, 세대를 넘어 진지하고 성실한 예술가 집단 혹은 예술 애호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심으로 교감하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계셨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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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별세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국악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들었다. Right Now Music 제공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이제 정말 코앞에 두고 있는 선수들에게 보내는 이보다 더 울림이 있는 메시지가 있을 수 있을까? 내게는 이런 말처럼 들린다. “평양 올림픽 어쩌구 하는 말들은 신경 쓰지 마. 이념도 이념장사도 결국 교활한 정신의 산물이니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직하고 신성한 육체의 힘을 보여줄 때라고. 육체로 세계를 감동시킬 때.”
서울대 법과대학 출신인 선생께 ‘안태근 성추행 사태’에 대한 한 말씀을 부탁드리면 뭐라고 답하실지도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법과대학 나온 사람이라서 하는 말인데 그걸 원시불능이라고 해. 원래 불가능한 거. 공부 좀 잘해서 그냥 저 잘난 맛에 사는 안하무인이라 다른 사람한테 결코 사과나 용서 구할 일이 있을 수 없어서 종교에 회귀한 척하는 거야. 그런 인간들은 평생 간증이나 하면서 살게 하면 돼.”
대신 자신을 두고두고 괴롭힌 성추행 사건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폭로하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낸 서지현 검사에게는 황병기 선생이 평소 가장 좋아했던 <채근담>의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바람이 대나무 밭에 불어. 그럼 대나무가 우수수 울지. 그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나무가 소리를 남기지 않아. 고요해지지. 사람의 마음도 어떤 일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지나가고 나면 비워져. 완전히. 뭐를 가슴에 남겨둘 필요가 없어.”
그리고 <채근담>에 나오는 이 대목과 꼭 어울리는 황병기 선생의 음악을 서지현 검사에게 들려주고도 싶다. 세상의 그 어떤 음악보다 차갑고 고결하면서도 신선한 ‘비단길’이나 ‘침향무’ 같은 가야금 산조. 마치 대나무숲 한가운데에서 듣는 청명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교교한 달빛 아래 흐르는 호수의 잔물결 같기도 한 음악, 슬픔으로 공명하며 상처 받은 우리 영혼을 우아하게 위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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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젊은이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했던 것처럼 이제 고인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서 사시게 된 선생께 ‘안녕’이라고 인사드린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의 음악과 말씀을 듣게 되어 인간 후배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슬픔과 기쁨을 그동안 매우 품위 있게 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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