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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산타크루즈는 봄부터 여름까지 약 6개월간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리는 사막지대다. 바로 그곳에서 아내는 무용가로, 남편은 작곡가로 사는 부부가 있다. 미 서부지역에서는 꽤 알아주는 예술가 커플이다. 그런 그들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첫 비가 내리면 듣는 음악이 있었다. 황병기의 ‘가을’이었다. 마치 축제일의 의식인 듯 지난 3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 곡을 들었다고, 무용가 아내가 자기 집에 황병기를 초대해서 얘기했다.

황병기는 그런 음악가였다. 국악이라는 한국인에게조차 낯선 미지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두고두고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든 분. 그뿐 아니라 국악을 전대미문의 전위적인 실험 음악으로 안착시킨 진정한 ‘대가’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지금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황병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경과 인종, 세대를 넘어 진지하고 성실한 예술가 집단 혹은 예술 애호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심으로 교감하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계셨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다.

지난달 31일 별세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국악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으로 만들었다. Right Now Music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거장이나 대가로서의 허세가 없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젊은이들에 대한 몰이해를 무슨 자신만의 특권인 양 휘두르는 옹고집 어른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가야금을 연주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클래식은 물론 재즈나 포크, 심지어 노라조 같은 대중가요를 들으며 음악과 시대를 더 충실하게 가슴으로 껴안으려 한 분이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양분을 찾아 늘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진짜 어른. 그리하여 몇 해 전 새해 인사차 인터뷰를 청한 자리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연주자가 매일 연주 안 하면 안돼. 연주가 육체 행위라 그래. 스포츠하고 똑같은 거야. 김연아나 장미란이 한 달만 안 해봐. 못해. 육체 행위는 정직하거든. 그리고 속임수가 안 통해. 정신은 교활해서 거짓말도 하고, 사람도 속이고, 핑계도 대고 그러지. 게으름도 피우고 말이야. 그런 거 보면 육체가 정신보다 훨씬 신성하고, 더 위대한 거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이제 정말 코앞에 두고 있는 선수들에게 보내는 이보다 더 울림이 있는 메시지가 있을 수 있을까? 내게는 이런 말처럼 들린다. “평양 올림픽 어쩌구 하는 말들은 신경 쓰지 마. 이념도 이념장사도 결국 교활한 정신의 산물이니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직하고 신성한 육체의 힘을 보여줄 때라고. 육체로 세계를 감동시킬 때.”

서울대 법과대학 출신인 선생께 ‘안태근 성추행 사태’에 대한 한 말씀을 부탁드리면 뭐라고 답하실지도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법과대학 나온 사람이라서 하는 말인데 그걸 원시불능이라고 해. 원래 불가능한 거. 공부 좀 잘해서 그냥 저 잘난 맛에 사는 안하무인이라 다른 사람한테 결코 사과나 용서 구할 일이 있을 수 없어서 종교에 회귀한 척하는 거야. 그런 인간들은 평생 간증이나 하면서 살게 하면 돼.”

대신 자신을 두고두고 괴롭힌 성추행 사건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폭로하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낸 서지현 검사에게는 황병기 선생이 평소 가장 좋아했던 <채근담>의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바람이 대나무 밭에 불어. 그럼 대나무가 우수수 울지. 그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나무가 소리를 남기지 않아. 고요해지지. 사람의 마음도 어떤 일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지나가고 나면 비워져. 완전히. 뭐를 가슴에 남겨둘 필요가 없어.”

그리고 <채근담>에 나오는 이 대목과 꼭 어울리는 황병기 선생의 음악을 서지현 검사에게 들려주고도 싶다. 세상의 그 어떤 음악보다 차갑고 고결하면서도 신선한 ‘비단길’이나 ‘침향무’ 같은 가야금 산조. 마치 대나무숲 한가운데에서 듣는 청명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교교한 달빛 아래 흐르는 호수의 잔물결 같기도 한 음악, 슬픔으로 공명하며 상처 받은 우리 영혼을 우아하게 위로하는 음악.

“진짜 기쁨은 슬픔에서 나오는 거야. 슬픔을 뱃속에서부터 다 집어넣고 나오는 기쁨. 그게 진짜 기쁨이지. 물론, 슬픔이 슬픔으로만 끝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괜히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너무 걱정도 하지 마. 그냥 현재에 살면 돼. 걱정이나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그건 유령 같은 거라고. 굳이 일부러 상대할 필요 없는 유령. 유령은 유령대로 지들끼리 살게 내버려 두면 되는 거고(웃음).”

선생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젊은이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했던 것처럼 이제 고인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서 사시게 된 선생께 ‘안녕’이라고 인사드린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의 음악과 말씀을 듣게 되어 인간 후배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슬픔과 기쁨을 그동안 매우 품위 있게 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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