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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해보자. 경향신문사가 외주사업체를 설립해 내가 소속된 토요판팀 등 일부 부서 기자들을 보내겠다고 한다. 기사와 칼럼을 쓰는 업무는 그대로다. 외주사업주는 퇴직한 경향신문사 임원이다. 그는 사업자등록부터 채용·노무관리까지 본사 지침대로 한다. 직무와 관련된 지휘·명령도 본사 편집국장을 거쳐 이뤄진다. 외주사업체에 입사한 나는 1~2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처지가 된다. 견디다 못해 소송을 낸다. 1·2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불법파견이라며 ‘직접고용’하라고 판결한다. 본사에선 기사·칼럼 작성을 원하면 해당 업무를 전담하는 자회사로 가라고 한다. 직접고용을 원하면 신문제작과 무관한 업무를 맡기겠다고 한다. 나는 입사 이후 29년간 뉴스 콘텐츠를 만드는 일만 해왔다. 경향신문사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경향신문사는 대법원 판결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꼼수를 썼다는 비난에 직면하고, 불매운동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대표이사는 고소당해 검경 수사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9월12일 ㅊ출처:경향신문DB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곳이 있다. 한국도로공사(도공)다.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원래 도공 정규직이었다. 2000년대 외주화가 시작됐고 이명박 정권 때 모두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후 1~2년, 짧게는 6개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처지가 됐다. 외주관리자는 대부분 도공 출신 은퇴자들이었다.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2013년 소송을 냈다. 1·2심 모두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도공은 지난 7월 수납 업무 전담 자회사 ‘한국도로공사서비스’를 출범시켰다. 노동자 6500여명 중 5000명가량이 자회사로 옮겼다. 자회사 전환을 거부한 1500명은 일자리를 잃었다. 상당수가 10~20년 이상 근무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옥상구조물) 위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마침내 지난달 29일 ‘도공은 요금수납원들을 직접고용할 의무가 있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노동자들이 도공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한 점, 업무 처리 과정을 도공이 관리·감독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노동자들이 사직하거나 해고됐다 하더라도 도공의 직접고용 의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자회사 전환에 반대해 농성 중인 노동자들도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취지다.

본격적인 귀성 행렬이 시작된 11일 오후 톨게이트 요금수납 해고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기 성남시 서울톨게이트 10m 높이 옥상구조물(캐노피) 위에 함께 모여 한국도로공사의 ‘직접고용’을 촉구하고 있다.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톨게이트 요금수납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74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강윤중 기자

노동자들은 환호했다. 추석 연휴를 가족과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강래 도공 사장은 기대를 무참히 배신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시선이 쏠려 있던 지난 9일, 그는 승소가 확정된 노동자 등 499명을 직접고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직접고용을 원하는 노동자에겐 버스정류장·졸음쉼터 등의 환경정비(조경·청소) 업무를 맡길 것이라고 했다. 앉아서 일하는 요금수납 노동자 가운데는 장애인이 상당수다. 이들에게 조경·청소 업무를 하라는 건 직접고용을 포기하란 말이나 매한가지다. 수납 업무를 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자회사로 가라는 압박이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경북 김천의 도공 본사로 달려가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이틀째인 지난 10일, 경찰은 건물 주변에 에어매트를 까는 등 강제해산 시도에 나섰다. 대다수가 40~50대 여성인 노동자들은 “몸에 손대지 말라”며 일제히 ‘상의 탈의’로 저항했다. 눈물과 비명과 절규가 이어졌다. 1976년 같은 이유로 상의 탈의 시위를 했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연상케 했다. 놀란 경찰은 진압을 보류했다.

도공 측은 1·2심 계류 중인 1000여명과는 소송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전국에 산재한 도공 영업소를 통일적으로 운영·관리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인정했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서울톨게이트 영업소에서 불법파견이 이뤄졌다면, 다른 지역 영업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가 수립된 만큼 하급심에서도 도공이 패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도공은 확정판결 받은 노동자와 1·2심 중인 노동자를 갈라치고, 환경정비 업무를 받아들이는 노동자와 자회사로 가는 노동자를 갈라치려 하고 있다. 시간을 끌수록 ‘노·노 갈등’을 부추겨 저항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도공은 공공기관이다. 사기업보다 모범적인 사용자의 모습을 보여야 옳다. 요금수납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는 것은 대법원 판결에 따른 당연한 조치다. 원래 정규직이었던 만큼, 특혜도 아니고 원상회복일 뿐이다. 이강래 사장은 즉각 노동자들과 교섭에 나서야 한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도공 본사 농성을 강제해산할 생각을 접어야 한다. ‘43년 전 동일방직’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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