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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특집기획부장
김연아는 지난 16일 치러진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5차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부진했다. 7개 점프 가운데 3개를 실패했다.
전날 쇼트프로그램을 탁월하게 연기한 덕에 우승은 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선 2위에 그쳤다. 경기 후 그는 “이렇게 점프를 ‘말아먹은’ 게 오랜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경기 전부터)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칠 것 같다는 걱정과 불안감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나흘 뒤인 20일. 이명박 대통령이 2018 동계올림픽 유치전에 나선 강원도 평창을 찾았다. 이 대통령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 나름의 조언을 했다. “국제적 피겨 스타인 김연아 선수를 홍보에 ‘활용’하면 좋을 것”이라며 “내년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평창 동계오륜 깃발을 들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면 큰 홍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활용’이라는 표현. 처음엔 놀라웠고, 조금 지나자 불쾌해졌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기사로 다룬 한 인터넷매체의 댓글도 다르지 않았다.
“연아가 올림픽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생각해보셨나요?”
“그래서 (올림픽) 유치 안되면 연아는 뭐 되는데?”
“미안하다 연아님, 내가 다 미안해”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삐에로로 만들겠다니...”.
김연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이자 세계적 피겨 스타이지만 그 이전에 한 사람의 독립적 인격체다. 국민을 개별적 존엄성을 지닌 삶의 주체로 바라보는 대신, 집단의 목표 실현을 위한 ‘가용 자원’으로 대상화하는 듯해 두렵다.
‘한 마디’ 갖고 침소봉대하는 것 아니냐 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사한 징후들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최근 전국 시·군·구별로 ‘아이 낳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저출산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문제는 출범식이 보여주는 ‘낡음’이다.
지역마다 수백명씩 모아놓고 출산장려 홍보영상물을 틀어준 뒤 행동선언문을 낭독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국민 동원’의 풍경이다. 내가 사는 이 땅이 행복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 아이도 낳고 싶어진다는, 저출산 문제의 본질은 뒷전으로 미룬 채, 메가폰 들고 구호 외치면 국민들이 달라질 것이라는 발상은 치졸하다.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 공무원 연가 사용과 학교별 재량휴업을 장려하고, 휴일 중복을 방지해 실질적으로 쉬는 날을 늘리겠다는 방안도 ‘국민 동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다. 휴일을 늘린다면 ‘가엾은’ 국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보장하기 위한 것이어야 마땅하다. 휴일을 늘리는 이유가 관광산업 활성화라니, 다른 나라에서 알까 겁이 난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인근의 여자 고등학교에 다녔다. 의무적으로 하는 자율학습이 이따금씩 면제되곤 했다. 한국을 찾은 외국 정상이 청와대를 방문하는 날이면 그랬다. 도로변에서 1~2시간씩 줄지어 기다리다 정상이 지나가면 1~2분 손 흔드는 게 우리 임무였다. 철 모르는 소녀들은 자율학습 면제라는 ‘당근’에, 뙤약볕도 찬 바람도 용케 견뎌냈다.
20여년 전 숨을 거둔 줄 알았던 ‘국민 동원’의 정치가 부활하고 있다. 동원의 양상도 전방위적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월드 스타에서부터 생활의 무게에 눌려 아이 낳기 두려운 필부필부(匹夫匹婦)까지. 동원하는 이들은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댈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가 갑자기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된다 해도, 그 목표를 위해 누군가 동원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김연아는 국가든 민족이든 학교든 특정 집단의 동원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의 재능은 온전히 그의 삶과 꿈을 위해 쓰여야 한다.
개인의 가치가 집단의 논리에 복속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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