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지리적 상상력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지리학자처럼 고정관념에 갇힌 이들도 의외로 많다. 아마도 지리적 상상력이 필수인 직업은 도둑이 아닐까? ‘값진 물건이 어디에 많이 있고, 어떻게 귀중품을 몰래 훔쳐올 수 있는지’ 지리교과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뛰는 도둑 위에 나는 명탐정이 있는 법! 교묘하게 감시의 눈길을 피해 도망 다니는 범죄자의 위치와 경로를 추적·체포해 결국 이들을 감옥에 보내고야 마는 베테랑 형사들은 지리적 상상력의 진정한 달인 같다. 한편 수감자 중에는 감옥에서 만난 동료로부터 신기술을 배우고 전문성(?)을 높여 출소한 이후 더 큰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다 하니, 일반인들에게 감옥은 나쁜 이미지로 가득한 부정적 공간으로만 인식될 것 같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감옥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통찰력을 기르는 깨달음의 장소, 세상을 보다 정의롭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지리적 상상력의 특별훈련소가 되기도 한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아웅산 수지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은 모두 장기간의 가택연금과 수감생활을 거치며 위대한 정치인으로 단련되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체험한 고통과 절망을 승화시켜 <마지막 하나의 자유>라는 명저를 집필하고 ‘로고 테라피’를 창시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역시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좁은 공간에서 탁월한 학문적 성취의 기초를 닦았다.
27세에 사형수가 되어 20여년 옥살이를 거친 후 석방된 고 신영복 교수에게 감옥은 ‘인생을 공부하는 대학’이었다. 긴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하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기르며 공존의 철학자로 거듭난 고인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삶의 용기를 북돋워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글 ‘변방을 찾아서’에서 고인은 ‘경직된 중심부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 생명력이 넘치는 변방을 창조 중심지로 바꾸는 지리적 상상력을 발휘하자’고 제안하며 자신이 쓴 글씨가 있는 해남 땅끝마을의 초등학교를 찾아가 어린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던 천진난만한 어른이기도 했다.
청년기부터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운데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미래를 바꿀 힘을 기른 대표적 인물로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한 그는 게릴라 활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13년간 독방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매트리스 한 장만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기른 그는 특히 독서를 금지당한 수감생활 초창기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집중적으로 기를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50세에 감옥에서 나와 자유를 되찾은 그는 시골로 내려가 땅을 일구는 농부의 삶을 선택했다. 이후 상원·하원의원과 농축수산부 장관을 거쳐 2010년 75세의 나이에 우루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고 신영복 교수와 무히카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고생할 때 이들의 석방을 대가 없이 도와주고 끝까지 힘이 되어준 한 단체가 있었다. 독재 권력에 의해 자유를 잃은 양심수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밝혀준 작은 촛불,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다. 세계 각지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고 국가의 운명까지 바꾼 앰네스티의 기적은 한 영국인이 쓴 신문 칼럼에서 비롯됐다. 40대 인권 변호사 피터 베네슨은 포르투갈에서 자유를 외치다 투옥된 학생들을 돕기 위해 ‘잊혀진 수인’이란 제목의 글을 1961년 5월28일 ‘옵서버’지에 기고했다. 칼럼의 취지에 공감한 독자들이 힘을 보태면서 앰네스티의 나비효과는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답답한 감옥처럼 느껴지는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을 헤매며 힘들어하는 그대가 어쩌면 세상을 바꿀 새로운 상상력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안락한 중심부에 익숙한 금수저들은 변방을 찾아 나서야 할 절박한 이유도 없고 모험을 감행할 용기도 부족해 지리적 상상력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불리한 조건이다.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쏘다니며 다양한 만남과 체험을 통해 더불어 성장하는 기쁨을 한 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불쌍한 존재로 말이다.
■지리 꿀팁
앰네스티 본사는 런던 중심부에 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암울했던 20대 시절, 런던 앰네스티 본사에서 일하며 세계 곳곳에서 자유와 인권을 위협받는 약자들의 고통을 떠올리며 상상력을 길러 둔 것이 해리 포터 이야기를 쓸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원래 촛불은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서 더 환하게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150여개국에서 700만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앰네스티의 촛불을 함께 들고 있다.
김이재 |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희철의 건축스케치]눈 내린 향원정의 서정 (0) | 2016.01.20 |
---|---|
[시론]시민정치 참여, 마드리드에서 배워라 (0) | 2016.01.20 |
[안도현의 사람]부안시장에서 물메기탕 잘 끓이는 장순철 여사 (0) | 2016.01.20 |
[사설]청년의 내집 꿈이 있어야 주택시장도 안정된다 (0) | 2016.01.20 |
[사설]정권·재벌 합작 ‘관제 서명운동’ 광풍 멈춰야 한다 (0) | 201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