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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삼성전자 서울 서초동 사옥에선 진풍경이 연출됐다.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들이 수요 사장단회의를 마친 뒤 로비에 마련된 ‘경제 입법 촉구 서명운동’ 부스에 들러 줄줄이 서명을 했다. 현대자동차·LG 등 다른 대기업들도 회사 차원에서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재계뿐이 아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온라인 서명 장면을 담은 사진을 언론에 배포했고,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도 서명을 마쳤다. 다른 국무위원들도 서명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두서명 참여로 사실상의 총동원령을 내리자 관료와 재벌이 총대를 멘 것이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와 참여연대 등이 공개한 문서들을 보면, 경제단체·협회들의 서명운동이 반강제적·무차별적 동원 양상으로 흐르고 있음이 드러난다. 한 협회가 회원사들에 보낸 공문에는 ‘매일 16시까지 각사에서 취합된 (서명)숫자를 회신해달라’ ‘서명운동 대상은 각사 임직원 및 설계사, 대리점 등 보험업계 종사자와 계약자’라는 등의 ‘협조 요청사항’이 담겨 있다. 박 대통령은 서명운동을 두고 “오죽하면 국민들이 그렇게 나서겠는가, 얼마나 답답하면 서명운동까지 벌이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개된 문서들은 서명운동의 실체가 ‘관제 캠페인’이자 ‘여론 조작’에 불과함을 생생히 보여준다. 답답해서 서명운동에 나선 것은 ‘국민’이 아니다.
삼성사장단, 서명 동참…사옥 로비엔 부스까지 설치 삼성전자 사장들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그룹 사옥 1층 로비에 마련된 부스에서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이 주도하는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명 서명운동’에 서명하고 있다._연합뉴스
본래 서명이나 청원 운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표명하고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수단이다. 다양한 정책적·정치적 수단을 보유한 대통령이 거리로 나가 ‘선동 정치’를 벌이고, 총리와 장관이 충실히 뒷받침하고, 해당 입법에 이해관계를 가진 재계가 여론몰이를 하는 것은 용인하기 어렵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세력이,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건너뛰고 손쉬운 방법으로 의사를 관철하려 할 경우 민주주의는 위험해진다. 국회의 입법권이 부정당하고 의회민주주의 원칙이 외면당하면 모든 계층·집단이 거리에서 직접 충돌할 수밖에 없다. 관제 서명운동은 마땅히 중단돼야 한다.
독재정권 시절 중·고교에 다닌 이들은 비슷한 기억을 공유한다. 결의대회·궐기대회류의 대규모 집회에 참가해 구호를 복창하던 풍경이다. 이러한 ‘국민 동원’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후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박근혜 정권이 역사의 유물을 되살려내고 있다. 한국은 ‘관제 데모’가 횡행하던 30~40년 전으로 퇴행했다. 설 연휴 귀성길, 박 대통령이 ‘경제 입법 촉구’ 어깨띠를 두른 채 서울역 광장에 나타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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