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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참 춥다. 추운 날은 이불 속이 그립고 따듯한 밥도 그립다. 그저 한 끼 때우는 것이 아니라 따듯하고 맛있고 배부른 밥, 온몸을 다 녹여주는 밥.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집밥이고, 그중에서도 물론 어머니가 해주셨던 밥이다. 어려서 먹었던 어머니의 집밥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중에서도 몇몇은 그 향기와 온기, 그 음식이 담겼던 그릇의 모양까지 생생하다. 어머니들도 음식솜씨가 다 다르니 그 모든 음식이 다 최고의 음식은 아니겠지만, 맛에 추억이 입혀지면 그 맛이 음식의 맛으로만 남지 않는 법이다. 그걸 먹었던 날, 얼마나 더웠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심지어는 그걸 먹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기억이 날 때도 있다. 어느날은 슬펐던 기억도 있고, 입안에 침이 아니라 눈물이 고일 때도 있었다.

어려서 먹었던 것 중에 압도적으로 기억에 남는 음식들은 대개 김치와 관련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직도 가난했던 시절이라 돼지고기를 썰어넣어 끓인 김치찌개에는 늘 고기가 부족했었다. 형제들끼리 한 점의 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던 쟁탈전은 치열했고, 그렇게 차지한 한 점의 고기맛은 황홀했다. 기회와 성취와 양보와 사랑의 맛. 미사여구를 마구 갖다붙이자면 그런 맛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손으로 쭉쭉 찢어 숟가락 위에 얹어주던 김장김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걸 ‘긴김치’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늘 바빠 자식들에게 한가히 김치를 찢어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는데, 그래도 어머니를 졸라 밥상 옆에 앉혀야만 했었다. 내 손으로 찢으면 같은 맛이 안 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맛이라고 해두자. 지금도 가끔 김치를 그렇게 손으로 쭉쭉 찢어 물만 밥에다 올려 먹어보곤 하는데, 이건 긴김치가 아니라 그냥 찢어먹는 김치다. 옛날 맛이 안 난다. 추억이 간만 배여 깊은 맛을 못 내기 때문일 것이다. 멸치 육수도 없이 콩나물 한 줌도 안 넣고 그냥 쌀뜨물로만 끓였던 김칫국도 있었다. 그 맛이 또 그리워서 가끔 시도를 해보는데, 기억 속 맛이 아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조리법을 물으면 그 대답이 늘 신통치 못했었다. 그냥 적당히 적당히, 대충 대충. 모든 조리법의 설명이 그런 식이었다. 더 캐물으면 너무 많이는 넣지 말라 하고, 그렇다고 맛이 안 날 정도로 너무 적게도 넣지 말라고 했다. 너무 오래도 끓이지는 말되 푹 끓이라고는 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결국, 모든 조리법의 설명이 ‘적당히’로 귀결되는 것이다. 손맛으로 익히고, 세월로 익히고, 자식들의 배 따듯하게 불려줄 마음으로 익힌 조리법을 간단한 말로 설명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은 안다.

그래서 나 역시 적당히 시늉만 내는 수밖에 없다. 요리는 적당히 시늉으로만 내고, 먹는 건 추억이다. 따듯한 밥상의 추억, 그걸 먹을 때 한겨울 지글지글 끓던 온돌바닥의 뜨거움, 동치미 사발에 얼어있던 살얼음의 이가 시린 차가움. 김치비빔밥을 한 양푼 만들어놓고 영역 다툼을 하던 형제들, 숟가락으로 양푼에 금을 그어놓는 것도 모자라 침을 뱉는 시늉까지 했던 내 짓궂은 형제들,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부르던 어린 나, 그런 추억들.

도시락의 기억도 있다. 생일날이면 어머니는 고기반찬을 한번씩 싸주었는데, 혹시 친구들한테 뺏길까봐 그걸 밥 속에 꾹꾹 묻어주셨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뭐 이렇게까지 하시나, 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보물찾기 같은 도시락의 기억이 되었다.

슬프고 쓸쓸한 밥도 있다. 영화 <밀양>에서는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은 여주인공이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야말로 끼니를 때우는, 한 끼니의 시간으로부터 냉정하게 상처 입고 있는 장면이다. 삶으로부터 완전하게 버려진, 속속들이 다친, 그러나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어머니의 밥이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본 적도 있다. 좁은 경비실 안에서 밥을 그릇에 푸지도 않고, 그냥 밥솥째 꺼내놓고 점심을 때우던 우리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의 밥. 택배물건을 찾으러 갔더니 그렇게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밥은 밥솥째, 멸치는 봉투째, 그리고 고추장통 하나. 그게 전부인 식사였다. 그걸 들킨 아저씨도 면구했겠지만, 그걸 목격한 나도 당황스러웠다. 가난한 식사가 문제인 게 아니다. 가난한 반찬도 따듯할 수 있고, 그 따듯함과 함께 추억이 생길 수 있는 거니까. 음식의 맛이 아니라 식사의 맛이란 것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밥솥째 안고 그렇게 한 끼를 때우는 모습에서는 모욕이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 아저씨가 당하고 있는. 노동으로부터, 삶의 가치로부터 당하고 있는.

경비원 관련 보도가 나올 때마다 자꾸 그 아저씨의 밥솥이 생각난다. 최저임금 얘기가 나오고, 전원해고 이야기가 나오고 할 때마다 생각이 나는 건 그 밥솥이다. 최저임금은 사실 받아야 할 돈의 최저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노동의 가치를 말한다. 존중받아야 할,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치. 경비원이나 청소원들 중에는 휴게실이 없어서 화장실 안에서 밥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말도 안되게 갑질을 하는 입주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최저임금 때문에 휴게시간을 늘렸으나, 그 휴게시간이 정작 쉬는 시간이 아니라는 보도도 나온다. 돈을 버는 일은 밥 먹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은 내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먹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옛말이 되었다. 아니, 옛말이 되었어야만 한다. 그것은 가치를 지키는 일이고, 당연히 가치를 존중받아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그 노동의 가치가 한 끼 밥을 따듯하게 지켜주는 것이기는 해야 한다.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 한 토막만 더 이야기하자. 내 어머니는 하숙집을 했는데, 가난한 하숙생들이 하숙비를 제때 내는 적이 거의 없었다. 사정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욕도 했다. 그리고 서로 감정이 상했다. 

그러나 어느 해의 여름, 냉장고를 처음 들여놓던 날에는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하숙생들 모두가 냉장고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각기 숟가락 하나씩만 들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수박화채가 나오자마자 하숙비를 제때에 낸 하숙생이든, 몇달째 밀리고 있는 하숙생이든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우르르 달려들었다. 맛있고, 행복했던 저녁나절의 추억이다.

경비원들이 일하는 아파트는 부자 아파트이기도 하고 가난한 아파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모두가 이웃이기도 하다. 임금을 어디까지 올리느냐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어디까지 인정되느냐의 문제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으로, 그들의 밥 한 끼가, 아니 세 끼 전부가 따듯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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