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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우리나라 남성들의 삶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유능하다는 말의 뜻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학교 다닐 때는 물론 대기업의 임원, 고위공무원 등으로 줄곧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오다 은퇴한 친구들을 만나보면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살 줄도 모르고, 배울 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어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생활을 한 기간보다 그렇지 않은 기간이 긴 나는 그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것 봐라. 이제야 백수의 제왕인 내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가를 알겠지?” 하고 놀린다. 그러면 친구들은 주둥이를 댓 발씩 내밀며 “너는 글쟁이니까 그렇지!” 하고 항의한다. 그런데 글쟁이가 아니면 주위의 구체적 사물이나 사람,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가?

산업사회 시대 이래 우리 학교에서는 주로 개념적 앎을 가르치고 중요하게 평가해왔다. 할 줄 앎, 배울 줄 앎, 살 줄 앎은 기껏해야 특별한 성향을 갖는 개별 교사가 틈틈이 가르치거나 몇몇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개념적 앎이란 주로 세분화된 분과학문의 지식을 요약한 것이고, 세분된 분과학문의 지식이란 세밀하게 분업화된 산업사회의 노동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결국 산업사회의 학교는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작업벨트에서 세밀하게 분업화된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고,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여 학생들을 성공한 유능한 사람과 실패한 무능한 사람으로 나누었던 셈이다.

이러한 교육이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가는 농촌 소도시의 학교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농촌 소도시의 학교는 꼭 외계에서 날아와 앉아있는 UFO 같다. 교원들은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아침 8시가 되면 소비행정을 타고 나타났다가 오후 4시 반이 되면 소비행정을 타고 외계로 사라진다. 이 외계인들은 낮 동안 아이들의 두뇌를 만져 그 지역을 떠나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벨트가 있는 외계로 가는 것이 유능하며 성공한 것이고 그 지역에 남는 것은 무능하고 낙오한 것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아이들이 그 지역에 남더라도 자기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도록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쳐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그 지역에 남는 아이들은 자신을 낙오자로 인식하고 그 지역의 삶을 낙오한 삶으로 인식하여 스스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삶이 황폐화되는 것은 학교교육에서 성공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 학교교육을 받고 분업화된 노동구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작업벨트상에 있을 때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지만 그 작업벨트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나마 이와 같은 산업사회 교육시스템, 사회시스템은 자본이 국가의 통제 범위 안에 있어 국가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안정적 노동기회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삶의 황폐화를 최소한의 선에서라도 보완할 수 있는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 있을 때 지속가능하다.

얼마 전 모 재벌 디스플레이 회사 사장이 새로 짓는 공장과 관련해서 한 발언이 교육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사장은 이 공장은 전면적으로 인공지능 자동화가 이루어져 인력을 고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회사는 한국과 무관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 회사는 한국 사람을 고용하지도 않고 한국에 물건을 팔지도 않으니 한국 국민의 삶에 관심 없다는 말이다. 자본이 국가의 통제 범위 안에 있을 때는 자본이 어쩔 수 없이 국민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자본은 국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고, 국민의 삶에 무관심해졌다. 그에 따라 국가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안정적 노동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없고, 사회보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미 은퇴한 우리 산업화 세대는 학교에서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그러한 앎에 무관심했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 안정적 직장을 보장받아 은퇴 이후의 삶이 그렇게 길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 세대에겐 학교가 개념적 앎만을 가르치고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 자동화가 급속히 진전되어 직업의 안정성이 사라지고, 조기퇴직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이 없다면 개인의 삶이 황폐해지고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가 와해될 수도 있다. 개념적 앎만이 아니라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치는 학교교육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교육 패러다임 전환에서 핵심 중 하나는 중앙정부가 부여한 권한에 근거한 학교장의 지도력을 점진적으로 지역사회에 근거한 학교장의 지도력으로 바꾸어 학교가 더 이상 외계에서 날아와 앉은 UFO가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정책이 요즈음 활발하게 거론되는 지방분권, 교육자치 분권 정책일 텐데 아직까지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자치단체 사이의 권한 배분 논란 수준에 머물러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근래 교육정책들을 보면 대입정책이든, 직업교육정책이든 꼭 소년·소녀 실종사건을 보는 느낌이다. 어떤 정책이든 개념적 앎을 기준으로 상위 10%의 아이들만 있고 나머지 90%의 아이들은 없다. 90%의 아이들은 어디로 갔지? 누가 돌보지? 지방분권, 교육자치 분권 논의가 지역사회에 근거한 새로운 학교장의 지도력 논의로까지 깊어져 이 물음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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