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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해고 기간은 35년, 정년을 맞는 올해 36년차에 접어든다. 그 해고를 청산하기 위해 34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왔다. 목적지는 청와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다. 왜 한 노동자의 해고 청산에 대통령이 나와야 하는가. 그의 해고에 국가폭력이 개입해 있어서다. 그의 복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적 과제다. 사측이 밝힌 김진숙의 해고사유는 무단결근. 무단결근의 이유는 대공분실에 무단으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잡혀간 이유는 어용노조를 비판하는 홍보물을 뿌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1986년 독재정권 말기였다. 김진숙이 고문을 받았던 곳에서 대학생들이 죽어 나왔다. 영도조선소 앞에 살았던 서울대생 박종철도 그중 한 사람. 민주화가 되자 함께 싸웠던 대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더러는 높은 자리로도 올라갔다. 세상이 좋아졌다 했는데, 노동자들의 세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더 나빠졌다.
김진숙이 걸어오는 동안 그 시간이 되살아났다. 그의 존재는 독재정권을 끌어낸 저항의 역사에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훗날 시민운동으로 기록된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주변화되고 지워졌다. 그가 해고되어 돌아오지 못한 시간 동안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그가 해고를 당했을 때는 조선소 말단 용접공도 비정규직은 아니던 때, 노동자는 다 노동자이던 때였다. 노동자들은 힘을 합쳐 차별에 대항해 싸웠다. 관리직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왜 노동자들은 식당이 없는가, 관리직은 화장실이 있는데 왜 노동자들은 화장실도 없는가, 물으며 싸웠다. 그런 노동자들이 촘촘히 차등화·위계화되어, 정규직·비정규직이 신분이 되고, 노동자가 노동자를 차별하는 세상이 되었다. 해고는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이런 분리통치를 노무관리 기술로 도입한 건 기업이지만 그걸 합법으로 만들어준 건 국가다. 기업이 필요로 할 때 노동자를 갖다 쓰고, 필요 없으면 얼마든지 잘라버릴 수 있도록, 마음대로 쓰다 버리는 법은 어디서 만들어졌던가. 스스로 민주정부라 이름 붙인 신자유주의 정부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권의 핵심 인사였고, 스스로 계승자를 자임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과오에 대한 책임도 계승해야 한다. 김진숙은 그 ‘정치의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36년 동안 일어났던 중대한 변화는 또 있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 시기는 세계적으로 탄소배출량 증가가 가속화됐던 시기이기도 하다. 민주화와 함께 ‘세계화’가 도래했다. 독재가 끝나고 세상은 분명 달라졌는데, 이상하게 달라졌다. 배와 비행기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쉴 새 없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날랐다. 이곳의 밤이 저곳의 낮이므로, 고삐 풀린 자본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밤낮없이 돈을 벌었다. 글로벌 경제는 일국적 차원에서도 24시간 경제를 탄생시켰다. 24시간 편의점이 생겨났고, 24시간 홈쇼핑이 생겨났다. 화물차는 밤새 고속도로를 달렸고, 전기도 밤새 흘러야 했다. 밤이 없는 사회가 탄생했다. 노동자들은 밤낮 없는 노동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김진숙의 복직투쟁은 이 모든 잘못된 경제에 대한 시정 요구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오류를 사회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면 경제적 오류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법이 이미 그래서 어쩔 수 없다 하고, 기업의 일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며 시장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지만,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재빠르게 법을 바꾸고 정책을 내놓으며 시장에 개입한다. ‘비상사태이기 때문에’ 집합금지·영업금지 명령은 내릴 수 있는 정부가, 노동자 민중을 위한 해고금지 명령은 왜 할 수 없단 말인가. 지난 30년간 가속화된 노동유연화는 인간의 삶을 생태적으로 파괴하는 반생명적 정책이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강도를 줄이고, 야간노동을 금지하는 것, 한 사람의 일을 두 사람이 나누어 여가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지구 절멸의 신호를 보내오는 기후위기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전환을 말한다. 그러나 노동의 생태적 전환 없는 정의로운 전환이 과연 가능한가. 한진중공업은 저항의 상징이던 85호 크레인을 해체해 버렸지만 김진숙은 해체하지 못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걸어오는 노동자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과거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 그러니 함께 상상하고 요구하자. 우리가 꿈꾸는 노동의 미래를. 그건 자동화나 로봇경제 같은 노동의 기술적 전환이 아니라 ‘노동의 생태적 전환’이다.
채효정<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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