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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새해가 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만나는 이들마다 선거를 이야기한다. 정치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선거 못지않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1987년 6월항쟁의 25주년이다.

25년은 시간의 굵은 마디를 이룬다. 현재의 시점에서 6월항쟁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없이 착잡하다. 절충적 시각에서 6월항쟁은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실패한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6월항쟁은 ‘좌절된 시민혁명’에 가깝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악화되는 분배구조, 분출하는 사회갈등이 6월항쟁의 현재 성적표다. 민주화 시대를 열었건만 그 주인인 시민 다수가 주변으로 내몰리고 소외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먼저 1997년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를 지목할 수 있다. 4대 부문 구조조정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사회 양극화를 강화함으로써 ‘1 대 99 사회’를 만들어왔다. 더하여, 미래지향적 산업구조 개편에 전력투구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감세의 기득권 지키기, 4대강 개발의 토건사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준비 안된 개방 전략에만 몰두한 결과다.

6월항쟁의 그늘에 대한 책임을 신자유주의와 보수 세력에게만 떠넘길 순 없다. 이른바 ‘개혁세력’의 책임 또한 엄중하다. 남북 평화공존과 복지국가의 기본 설계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비정규직 및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분배의 정치’와 양극화 해소 및 약자 보호를 위한 ‘재분배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갈망했던 6월항쟁 25년이 흐른 현재,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공화국의 위기’다. 공화국의 의의는 사적 이익에 앞서 공공성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문제는 아시아 민주화를 선도한 우리나라에서 정작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 원리인 배려·책임·정의의 가치들이 여지없이 부정되고 있는 현실이다. 절대권력의 그늘 아래 이뤄진 추악한 측근 비리, 헌정질서를 뒤흔든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디도스 공격,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통고받는 해고의 현실이 ‘보수 대 진보’의 복잡한 이념틀이 아닌 ‘상식 대 비상식’ ‘꼼수 대 정도(正道)’의 간명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두 개의 선거를 통해 부여된 올해의 과제가 정권교체를 넘어 공화국의 질서를 재구축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선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새로운 재구성이 요구된다. 그 첫번째 시험대는 오는 15일에 치러지는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다. 민주통합당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현재의 지지가 일종의 조건부 지지라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환멸이라는 정치적 반사이익을 넘어서 공화국의 복원을 위한 ‘새로운 진보’의 국가 비전 및 정책을 보여줘야 한다.


민주통합당 전당대회 예비경선을 통과한 후보자들 l 출처 경향DB



이번에 선출될 지도부는 총선과 대선을 총괄할 중대 과제를 안고 있다. 모바일 투표를 신청한 시민들은 물론 진보적 시민들도 이번 주 진행되는 경선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한·미 FTA·재벌·비정규직·복지·원전, 그리고 지역주의에 대한 개별 후보들의 정책 및 전략을 꼼꼼히 비교하고, 과연 누구에게 두 개의 선거 및 연합정치의 지휘를,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생산적 통합을 맡길지 지혜롭게 선택해야 한다. 리더십의 일대 혁신 없이 새로운 진보의 정치를 열 순 없다. 이번 전당대회가 위기의 ‘87년체제’를 과감히 뛰어넘을 정치적 첫 단추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해 말 이탈리아 피렌체를 잠시 들렀다. 알리기에리 단테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으로부터 추방됐지만, <신곡>을 통해 근대의 새로운 여명을 알렸다. ‘남들이 뭐라 하던 넌 너의 길을 가라.’ 단테의 메시지이자, 민주통합당에 전하고 싶은 말이다. 위기의 공화국을 구출하기 위해선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선 안된다. 부디 새로운 진보를 열기 위한 길을 당당히 걸어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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