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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1920년에 사망한 지 100년이 된다. “우리는 그에 필적할 정도의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베버의 묘비명이다. 베버가 갖는 생명력의 원천은 정치·경제에서 종교·문화까지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에 있다. 베버 사후 베버에 맞설 수 있는, 박식함과 심오함을 모두 갖춘 사회사상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짧은 칼럼에서 베버의 학문적 성취를 모두 다루긴 어렵다. 오늘 내가 주목하려는 건 그가 남긴 정치적 통찰이다. 베버는 1917년 11월 뮌헨대학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 초청으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강연했다. 1919년 1월 다시 초청받았는데, 이때 맡은 강연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였다. 이 강연에서 베버는 그동안 탐구해온 정치 현상의 사회학을 바탕으로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가의 덕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보였다. 사회학자 전성우는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함께 베버의 ‘학문적 유언장’ 같은 위상을 가진다고 평가한 바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담긴 학문적·실천적 의미는 여전히 각별하다. 그것을 나는 네 가지 시각에서 살펴보고 싶다. 첫째, 베버는 정치를 천직(天職)으로 부여받은 정치가를 ‘악마적 수단’을 가지고 ‘천사적 대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악마적 수단이란 은유는 강제력을 위시해 목표 달성을 위해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포괄한다.

둘째, 이러한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윤리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다. 신념윤리가 선과 악의 구별에서 도덕적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한다면, 책임윤리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대해 무제한적 책임을 지는 태도를 뜻한다. 바람직한 정치가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다 갖춰야 한다. 정치가 결국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책임윤리에 대한 베버의 통찰은 매우 날카로운 것이었다.

셋째, 이렇게 이중적 윤리가 요구되는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의 세 가지다. 베버에게 정치가의 역할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 데 있다. 이 정치적 대표성에 헌신하려는 태도가 열정이라면, 그 대표성에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가 책임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과 책임감 사이에서 요청되는 게 균형감각이다. 균형감각은 사물과 사람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태도이자 주어진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다.

넷째,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이 특별히 강조되는 까닭은 정치가 국가의 운영을 떠맡는다는 점에 있다. 어느 나라든 국가의 운영은 국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국정을 담당하는 일에는 무엇보다 현실적 성과가 중요하다. 베버에게 정치의 치명적인 두 가지 죄악은 ‘객관성의 결여’와 ‘무책임성’이다.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채 주관적 판단에만 의존하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국가 정책을 추진할 경우 그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정치 실패에 대한 베버의 통찰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것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독특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한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란 시민의 직접투표로 대표를 선출하는 ‘국민투표제적 원리’에 기반하고 카리스마적 리더가 정치를 이끄는 ‘지도자 민주주의’다. 정치학자 최장집이 지적하듯, 베버의 민주주의론은 근대 대의민주주의론과는 다른 생소한 것이다. 베버가 이러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한 것에는 당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후발 국가였던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이 반영돼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베버의 통찰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가 분석하듯, 포퓰리즘의 도전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한국적 차원에서는, 여러 여론조사가 증거하듯, 대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더없이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포퓰리즘의 발흥이 베버가 말한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활로 볼 수 있다면, 한국적 차원에서 직업 정치가들은 베버가 강조한 균형감각과 책임윤리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성과를 요청받고 있다. 베버의 통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베버의 저작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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