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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하는 일 중 하나가 선거나 국민투표, 정당과 관련된 법령의 개정 의견 제출이다. 선거관리와 정당에 관한 사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제5 헌법기관이 내부 논의를 거듭해 내는 의견이라 정치권도 이를 존중한다. 실제로 정치권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선관위가 제안해 빛을 보게 한 제도가 한둘이 아니다. 정치신인의 선거운동을 허용한 예비후보등록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선관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실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부터였다. 지역감정 선거를 완화하고 표의 비례성·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를 눈여겨본 것이다. 의석 분배 방식이 워낙 다양하고 계산이 복잡해 처음에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선관위는 이 제도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한때 중대선거구제도 연구했지만, 비례성과 대표성 확보 효과가 제한적이고 지역주의 완화에는 무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게 15년 이상 연구·보완한 끝에 마침내 선관위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의견을 제출한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지 만 2년이 되던 2015년 2월이었다. 이듬해 치러지는 20대 총선부터 적용하자는 취지로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새누리당)도 처음에는 대놓고 이를 반대하지 못했다. 정당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해 사표를 막자는 논리와 정치개혁 명분이 워낙 뚜렷했기 때문이다. 취지에 공감한 일부 의원은 찬성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도 도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한국당은 반대입장을 명확히 했다. 좌파세력만 키우는 제도라는 것이다. 20대 총선에서 지역구 당선자는 많이 내지 못했지만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은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이득을 볼 것이라는 ‘예측된 결과’를 ‘좌파세력의 대한민국 장악이라는 각본에 따라’ 처음부터 기획된 것으로 날조했다. 선관위가 좌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것도 박근혜 정권의 서슬이 퍼럴 때 이를 제안했다는 주장인데, 어이가 없다. 그랬다면 한국당이 선관위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안다. 유권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는 연동형의 취지도 다 무시했다. 나중에는 ‘저질’ 국회의원의 숫자를 늘리는 나쁜 제도라고 몰아붙였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서라도 의석수를 지키겠다는 발상이었다. 선거법 개정안도 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논리를 끌어대며 반대만 했다. 

한국당이 비례용 위성정당 설립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중앙선관위에 ‘비례자유한국당’이란 이름으로 창당준비위 설치를 신고했다. ‘비례한국당’이 이미 있는 터라 이 이름을 쓴다는 것이다. 사무실은 한국당 당사에 두고, 대표자도 한국당 당직자다. 한국당은 지역구 후보만, 그리고 비례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 후보만 냄으로써 최대한 의석수를 확보한 뒤 다시 합치는 꼼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당 의원 30여명을 비례자유한국당에 등록시켜 한국당은 지역구 투표용지에서, 비례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 투표용지에서 나란히 ‘기호 2번’을 차지하는 복안도 내놨다. 창준위는 발기 취지에서 “많은 독소조항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야욕에 눈먼 자들의 야합으로 졸속 날치기로 (연동형 선거법이) 처리된 바, 꼼수는 묘수로, 졸속 날치기에는 정정당당과 준법으로 맞서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끝까지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 정정당당한 묘수라는 대목에서는 코웃음이 터진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유권자는 무시한 채 오로지 의석수만 보고 있다. 보수의 위신을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꿈도 못 꿀 일인데, 보수진영의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완벽한 선거제도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승자독식’이 한국당이 추구하는 가치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중립적 기관이 정치개혁을 위해 제안한 제도를 시종일관 걷어차놓고 막상 법이 통과되자 그 허점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것은 치졸하다. 창당 작업까지 다 해주며 위성정당을 만드는 것 자체가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헌법 8조2항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중앙선관위원들이 다음주 초 ‘비례자유한국당’의 최종 등록 여부를 검토한다. 한국당과 비슷한 이름을 써 표를 긁어모으는 것은 당연히 막아야 하며, 나아가 위성정당 설립 자체도 허용해서는 안된다. 한국당이 스스로 이 야바위 짓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선관위가 저지해야 한다. 정치를 발전시키지는 못할망정 후퇴시키는 정당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에 앞서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하는 촌극은 막아야 할 것 아닌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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