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각각의 시대는 심성적으로 자신의 우주를 만든다.” 프랑스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머리말’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성(心性)이 ‘망탈리테(mentalites)’다. 망탈리테란 특정한 시대에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 및 무의식을 지칭한다. 지적인 것은 물론 정서적인 것을 망라한 태도와 정조가 망탈리테를 이룬다.
내가 망탈리테를 주목하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망탈리테는 논리적 사유와 정서적 감정을 포괄한다. 망탈리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개인의 삶을 강제하는 시대적 구속에 대한 심층적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둘째, 바로 이 점에서 망탈리테는 ‘시대정신(Zeitgeist)’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시대정신이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을 말한다. 현재를 이루는 양축이 사회 제도와 집단 심성이라면, 이 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어렵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망탈리테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먼저 한 자료를 인용하고 싶다. 지난해 연합뉴스에 따르면, “1994년에는 일생 동안 노력을 통해 개인의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 60.1%에 달했지만 작년(2015년)에는 21.8%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부정적 응답은 5.3%에 불과했던 것이 20년 사이 62.2%로 수직상승했다.” 5.3%에서 62.2%로의 사회 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증가만큼 지난 20년 동안 사회 변동을 극적으로 증거하는 자료도 드물다.
‘불안사회’, ‘분노사회’, ‘격차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규정한 담론들이다. 1997년 외환위기 발생 당시 관심을 모았던 ‘20 대 80 사회’가 구체화된 담론이 격차사회다. 주목할 것은 이 격차가 계속 증가해 최근에는 일각에서 말하는 ‘압정사회’ 경향까지 보여준다는 점이다. 국민 다수는 하층을 이루고 극소수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압정과도 같은 사회로의 변화, 다시 말해 ‘20 대 80 사회’에서 ‘1 대 99 사회’로의 변동이 외환위기 20년의 역사였다. 불안은 분노를 유발하며 분노가 다시 불안을 구조화시키는 악순환은 격차사회에서 압정사회로 가는 문화적 풍경이다. 60%가 넘는 국민들이 노력을 통한 성공이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불안과 분노의 상태야말로 지난 20년의 망탈리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불안과 분노의 망탈리테는 영문학자 김우창이 통찰하고 사회학자 김찬호가 분석한 ‘오만과 모멸’로 표출된다. 부와 권력과 지위를 가진 이들이 타자에 대한 오만을 드러내고 이 자원들을 갖지 못한 이들이 모멸을 느끼는 이중 구조는 지난 20년 동안 더욱 공고화됐다. 무한경쟁(無限競爭)·적자생존(適者生存)·약육강식(弱肉强食)을 지상 과제로 하는 외환위기 이후의 구조적 강제 아래서 약자에 대한 오만이 가감 없이 분출되고 강자로부터의 모멸이 갈수록 심화돼 왔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만의 다른 이름이 ‘갑질’이라면, 모멸의 개인적 반응은 ‘혐오’다. 모멸로 훼손된 자아의 공격성은 혐오의 대응을 낳는다. 외환위기 20년을 맞이한 현재, 갑질과 혐오가 일상화된 그런 낯선, 그러나 낯익은 시민문화의 그늘은 불안과 분노의 망탈리테와 짝을 이룬다.
내가 시민문화의 그늘을 망탈리테로 파악하려는 이유는 그 복합적 의미망에 있다. 망탈리테는 사유와 감정,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른다. 불안과 분노의 마음이 포괄적으로 내면화되고 지속적으로 구조화돼온 만큼 이를 근본적으로, 집합적으로 치유하지 않는 한 이 그늘을 벗어나기 어렵다. 불안과 분노의 심리에 맞서 지난 20년 동안 ‘자기계발’과 ‘힐링’의 담론이 제시됐지만, 그것들은 개인적 위로에 머문 거품 또는 유행에 그쳤을 뿐이다. 집합적 비관주의를 개인적 낙관주의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갖는 의미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안과 분노의 일차적 원인이 격차사회에서 압정사회로 가는 사회구조적 현실에 있다면, 이 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개인적 처방은 자기 위안을 넘어설 수 없다.
둘째, 바로 이 점에서 망탈리테의 구조적 한계를 이뤄온 외환위기 이후 97년체제에 대한 성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97년체제란 앞서 말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구조화해온 체제다. 현상이 본질을, 표층이 심층을 선행할 순 없다. 97년체제가 낳은 격차와 차별과 불평등의 사회구조를 극복하지 않고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외환위기 20년을 맞이하는 한 사회학 연구자의 우울한 소회를 여기에 적어둔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고]공무원 증원은 안전의 충전 (0) | 2017.11.22 |
---|---|
[여적]청와대 그림 (0) | 2017.11.22 |
[공감]재난의 사회적 뿌리와 처방 (0) | 2017.11.22 |
[정동칼럼]대한민국 중년으로 산다는 것 (0) | 2017.11.22 |
[김성호의 자연에 길을 묻다]백령도 점박이물범 (0) | 2017.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