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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시 흥해읍에서 서로 이웃하여 사는 세 할머니는 대피소에서도 모여 앉아 있었다. 지진이 마을을 덮치던 그 시간, 할머니들은 일 년 중 이맘때만 할 수 있는 일당벌이인 사과 따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
“사과 딸 때는 사다리를 높이 쌓아 올라가서 따는데, 나무가 이래이래 막 흔들리면서 사과들이 우르르 다 떨어지는 기라. 세상 나서 그런 거 처음 봤어요. 그때 사다리에서 떨어졌으면….” 할머니들을 만난 곳은 지진 발생 엿새째였던 20일 오후 경북 포항시 흥해읍 남산초등학교 강당. 기온이 떨어지는 밤이면 외투를 껴입고 담요를 덮어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한다고 했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 가면서, 삭신이 쑤시고 두통이 끊이지 않지만 몸의 아픔보다 더 큰 것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내 집이지만 언제 붕괴될지 몰라 옷 한 벌 챙기러 들어갈 수 없게 된 집. 여섯 살 난 쌍둥이 손자들까지 열 세 명의 대식구가 대피소 생활을 하고 있다는 한 할머니는 “이리로 가라, 저리로 옮기라 해서 대피소 이사만 세 번을 했다”며 “이 많은 식구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냐”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규모 5.4의 지진이 포항 일대를 강타한 날, 나는 서울의 건물 5층에 앉아 책상과 의자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 몸을 훑고 간 그 잠깐의 진동만으로도 ‘재앙’을 뜻하는 영어 ‘catastrophe’의 어원이 왜 그리스어로 ‘아래’를 뜻하는 ‘kata’와 ‘뒤집다’는 뜻의 ‘strephein’의 결합인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발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느낌은 지금까지 내가 불변의 법칙처럼 여겨왔던 것들이 사실은 몹시도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으며 언제든 붕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그런 붕괴가 일어났던 날은 이번 지진을 겪은 날이 아닌 2014년 4월16일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도 아닌 청명한 봄날 아침에, 온 국민이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목숨들이 물속으로 잠겨가는 것을 본다는 ‘비현실의 현실’을 도대체 어떤 이성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2014년 4월16일 이전과 이후의 삶은 결코 같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붕괴하도록 모르고 있거나 눈감고 있었던 구멍 난 진실들을 속속들이 마주쳐야 했다.
포항의 할머니들을 만났던 날은 세월호 미수습자들의 영결식이 치러졌던 날이기도 했다. 채 동이 트기도 전, 박영인·남현철 두 학생과 양승진 선생님의 영정이 마지막으로 옛 교실과 교무실을 둘러보는 동안 건물 1층 바깥에 서서 기다리던 내 눈에 줄다리기를 하는 학생들의 커다란 사진 위에 새겨 넣어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은 단원의 미래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일깨운 것은 재난이 결코 특정한 개인에게 닥치는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사회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개인적 수준으로 환원해 진단할 것이 아니라,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중)는 처방전의 변화였다.
천재지변인 지진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집을 잃고 대피소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더 절망하며 병들거나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적 그물망을 얼마나 튼튼하게 짜는가는 공동체의 몫이다. 2014년 진도체육관에서 세월호의 유가족들이 오열할 사적 공간 하나 없이 한뎃잠으로 몇 개월을 보내야 했던 것과 같은 일들이 재난을 당하는 어느 누구에게서든 반복되지 않는 것이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 사회에 건설하라고 요구하는 미래의 방향일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사망사고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의 ‘사회적 참사 특별법’이 24일 국회에 상정된다. 희생자들이 못다 산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는가는 남은 이들의 몫이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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