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소지니(misogyny)에 대한 의견을 블로그에 올렸다. ‘여성혐오는 나의 문제다’라는 글이었는데, 5월23일에 올린 글의 링크가 소셜미디어에서 한창 돌아다녔다고,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어쩐지…. 며칠 동안 보기 드물게 블로그 트래픽이 나오더라니. 그 며칠 사이에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댓글이나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간혹 저주에 가까운 욕을 듣기도 했다.

인상적인 건 나를 규정하는 표현이 ‘중년, 남자, 교수’였다는 거다. 중년, 남자, 교수 말고도 나를 규정하거나 설명하는 단어가 많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 길게 쓰다가 지웠는데, 이 지면을 전부 다 채워도 모자라다. 중년, 남성, 교수라는 단어는 서로를 수식하며 어떤 권위를 만든다. 권위는 중년, 남성, 교수에서 전부 발화해 나를 덮는다.

중년, 남성, 교수라는 권위의 옷을 입는 순간 좀 어설프고, 모자란 개인인 ‘나’는 사라진다. 예컨대 원고 몇 줄을 제대로 쓰지 못해 끙끙대다가 한밤중 홈쇼핑 채널을 보다 잠이 든 구체적인 ‘나’는 없다. 권위의 옷은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권위가 나를 규정할수록 자유는 속박된다. 멀쩡하던 남자들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시정잡배처럼 껄렁거리게 되고, 익명의 게시판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댓글을 달지 않던가. 누군가는 지능이 모자란 거 아니냐고 묻지만, 길들여져서 그렇다.

권위에 길들여지면, 상대를 만나도 권위를 먼저 본다. 킁킁, 내가 해볼 만한 사람인가? 우리 사회가 유독 약한 이들에게 잔혹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보다 더 세 보이는 권위에는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26일 검은 옷을 입고 근조 표시가 붙은 거울을 든 시민들이 살인사건 현장에서 강남역까지 행진을 하며 여성혐오범죄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사회적 문제임을 표현하고 있다._경향DB


권위를 입고 있으면, 내 맨얼굴이 사라진다. 내 얼굴과 마주하지 못하니 내가 원하는 나를 모른다. 그러니 목덜미를 세우고 있다. 으르렁! 뭘 해도 피곤하고, 피곤이 누적되니 화가 난다. 걸리기만 해 봐라, 하는 마음뿐이다. 이미 누더기가 된 내 권위를 지키려 해 봐야 돌아오는 건 피곤뿐이다. 이제 좀 버리자.

우리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아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라고 말하는 뒤에 버려야 할 권위가 있다. 권위를 지키려고 지성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혐오’라는 단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권위의 옷을 추스른다. 오늘 이 문제는 토론이 아니라 요구다. 이건 누더기가 된 권위를 벗어버릴 기회다. 내가 중년, 남자, 교수가 아니라 딩가딩가 만화와 게임과 쓸데없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달콤한 제안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사선을 넘나들던 고난의 서사가 먹히는 시대가 끝이 났다. 세상은 자학으로 위로받기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그러니 내려놓고, 벗어놓고, 편하게 살자.

문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바쁘게 살다 지금 내 나이 무렵 어떤 사정으로 직장을 퇴직하고 저 멀리 서해 바닷가로 내려갔다.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연고도 없던 바닷가에 가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바닷가를 찾은 몇 안되는 이들에게 음료수를 팔았고, 나무를 다듬었고, 난을 채집하러 다녔다. 그 해인가 아니면 그 다음 해인가 신춘문예에 보낼 단편소설을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소설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표정보다 밝았다.

이제는 잔치도 하지 않는다는 환갑을 1년 앞두고 돌아가신 후 서재를 정리하다 동창회보에 쓴 수필을 봤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소설을 썼고, 소설가로 살고 싶었다는 내용이었다. 문득 청소년 시절 봤던 아버지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중년, 남성이 중년, 남성들에게 말한다. 낡은 권위 따위는 벗어버리면 어떨까? 이런 권유라도 하고 보니 2012년 4월부터 써 왔던 이 지면도 내 권위의 한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인하 | 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