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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대혁명 시기의 특징이었다. 조반파 사이의 논쟁이건 홍위병 사이의 논쟁이건, 아니면 부녀자들 사이의 말다툼이건 간에 최종적인 승리는 마오쩌둥의 말을 들고나오는 사람의 차지였다.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결론이 나고 쟁론과 말다툼도 즉시 끝이 났다. … 그 시기에는 신문에 실리든 방송에서 방영되든, 아니면 대자보에 나붙든 간에 거의 모든 글이 마오쩌둥 어록 다음으로 루쉰의 말을 인용했다.”
중국 소설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태양이 언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가’를 놓고 친구와 1년 가까이 논쟁을 벌이던 소년 위화는 “루쉰 선생님께서도 정오에 태양이 지구에서 가장 가깝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야!”란 거짓말로 지루한 논쟁을 한 방에 끝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루쉰이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문화대혁명 때 ‘루쉰’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중국에서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중국의 ‘루쉰’ 같은 단어가 지금 한국에서는 ‘비용’이 아닐까? 이 단어는 몇 개의 유사어를 갖고 있는데, ‘비용 절감’ ‘경영 효율화’ ‘구조조정’ 등이 대표적이다. 일단 ‘비용’으로 잡히는 모든 것은 절감해야 할 대상이며, 효율화의 타깃이자, 혁신해야 할 그 무엇이다. 이 필터를 거치면 ‘사람’은 ‘인건비’로, ‘안전’은 ‘유지보수비’로, ‘고용 안정성’은 ‘경상비 부담’으로 바뀐다.
“루쉰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틀림없이 네 말이 맞을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봐.” 슬픈 표정으로 패배를 인정한 소년 위화의 친구처럼, 용역 결과 보고서 하나면 “컨설팅 회사에서 전문가들이 그렇게 진단했다면 그 말이 맞겠지요. 저희가 잘못해 왔나봅니다”라며 정부조차 고개를 숙이고,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중국 작가 루쉰_경향DB
한때 중국에는 마오쩌둥의 어록이 밥그릇과 컵에도 인쇄돼 있을 정도로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은 어떤가? ‘비용 절감’ ‘경영 효율화’라는 키워드는 이미 사회 전반은 물론 사람들의 머릿속에조차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관리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경비 인력을 줄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며, 산업이 어려워지면 ‘구조조정’이 가장 먼저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공공영역도 결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부채 감축과 적자 개선, 인건비 절감은 공공기관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에서 확인했듯, 핵심 업무들은 경비 절감을 명분으로 민간에 넘어간 지 오래인데도 외주화는 여전히 공공부문 경영 효율화의 주요 평가지표로 남아 있다.
마오쩌둥 어록 다음으로 루쉰의 말을 인용했던 중국처럼 한국에서는 ‘비용 절감’이 절대적인 마오쩌둥의 어록 대접을 받고, ‘수익 창출’이 루쉰 선생님의 말씀처럼 떠받들어진다. 그러나 어떤 ‘비용’을 절감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접대비’는 필수 비용이지만, 안전 관련 비용은 절감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어떤 비용은 ‘지출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던 ‘루쉰’은 이제 대명사로서의 무게를 내려놓고, 작가의 운명을 되찾았다. 작가가 하나의 단어로 소비되는 것만큼 작가에게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루쉰은 작가의 위치로 돌아왔으니 다행이지만, 한국의 ‘비용’은 언제쯤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까? 과연 단어 원래의 운명을 찾아갈 수 있기는 한 걸까? 만능 키워드처럼 ‘비용 절감’만 내세우면, 모든 사회적 합의가 실종되는 지금이야말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때다. ‘비용’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비용’은 한때의 ‘루쉰’만큼이나 오용되는 단어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치르게 될 터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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