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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 소설가


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카운터가 소란해진다. 한 고객이 커피를 앞에 두고 항의하는 중이다. 방금 산 커피에서 비닐조각이 나온 모양이다. 


한눈에도 어리고 서툴러 보이는 아르바이트생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환불을 해줄지 다른 상품으로 교환해줄지 묻는다. 고객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고객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사과를 한다.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어진다. 

 

경향신문DB

고객은 지점장을 찾는다. 그러나 지점장도, 사장도 없다. 교육받은 지 얼마 안된 아르바이트생이 전부다. 결국 고객은 나중에 사과전화를 하라면서 번호를 남겨놓고 간다. 아르바이트생은 땀을 닦으며 서둘러 다음 주문을 받는다. 


흔한 광경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내는 사람, 즉 고객은 ‘왕’이다. 감히 고객에게 함부로 하는 업체는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다.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닐지라도, 소비자고발센터와 소비자보호원이 있고, 각종 소비자 관련 언론이 소비자를 돕는다.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각종 사이트들이 있다. 커피에서 나온 비닐조각은 사진과 함께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닐 것이다.


사실 소비자의 권리가 강조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때는 대규모 기업 앞에서 개인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았다. 제 돈 주고 사먹는 음식에서 정체 모를 생물체가 나와도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 권리가 강화되면서 제품에 대한 알 권리,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 선택할 권리 그리고 부당한 피해로부터 보상받을 권리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악용하는 <개그콘서트>의 ‘정마담’ 캐릭터가 희화화될 정도다.


그런데 드는 의문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민감한 데 비하면 노동자로서의 권리에는 무감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크레인에 올라 수백일째 농성 중인 노동자의 모습과 머리카락이 나온 햄버거 사진 중 어느 쪽이 빠르게 이슈화될까. 당연히 후자 쪽이다. 20만원을 주고 산 오리털 파카가 한 번 세탁하자 누더기처럼 변했다면 적어도 해당 매장에 가서 항의할 것이고, 적극적인 소비자라면 세탁심의를 신청할 것이다. 그래도 보상을 받지 못하면 인터넷에 이 분한 사실을 올리기라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수당 없이 초과근무를 해도, 최저임금제를 위반한 낮은 임금을 받아도, 애초의 계약사항을 회사가 이행하지 않아도 개인이 감내한다. 그저 회식 때 술 한잔 걸치며 삭이거나 정 못 참겠으면 이직을 결심한다.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소비자로서는 당당하지만, 노동자로서는 한없이 온순하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슬픈 현실이다. 


또 다른 흔한 이야기다. 월급 100만원 남짓 받는 중소기업 경리직원이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회사 돈을 지속적으로 빼돌린다. 발각된 뒤 수색한 경리직원의 집에서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백이 다수 발견된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다. 노동자로서 쌓인 스트레스는 고가의 제품이 즐비한 매장에서 대접받을 때 말끔히 풀린다.


사실 소비자 권위를 교묘하게 높이는 데는 업체들이 큰 몫을 했다. ‘고객은 왕’이라는 표어를 만들어낸 것도 기업이다. 고급 서비스로 차별화하며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렸다.국 ‘왕’은 돈을 쓸 때까지 시한부로 대접받는 소비자가 아니라,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소비자로 둔갑시키면서 사실 그 위에 군림한다. 


소비자가 왕의 권위를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감정노동 덕분이다. 소비자의 온갖 비위를 맞추면서도 높은 톤의 친절한 목소리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들 말이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환상을 깨면, 결국 남는 것은 우리 모두 노동자라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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