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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섭 | 문화평론가
가슴이 서늘하다. 단지 한파 탓만은 아니리라. 많은 이들이 지난 5년간 차고 넘칠 만큼의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을 잠시나마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012년에 있었던 두 번의 선거에서 이 고통은 그저 계산을 위해 필요한 많은 변수 중의 하나로 취급될 뿐이었다. 저마다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노라고 호언장담하는 가짜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고통은 점점 그늘진 곳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결과는 그나마 신통치도 않았던 야당의 패배였다.
향후 5년간 국가를 대표하게 될 이들은 벌써부터 이 고통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해고투쟁과 사측의 손배소에 고통받던 노동자들의 자살에 대해 인수위의 입장을 묻자 “그게 당선인과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다. 일부러 하는 소리라면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서 되물은 거라면 그 천진난만한 세계관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마침내 전 세계 1위의 자살률을 갖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이들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취급할지가 눈앞에 선하다. 사람들이 자꾸만 자살을 하니, 자살을 법으로 금지하자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출처: 경향DB)
곳곳에서 환멸이 고개를 든다. 환멸은 복잡하고 깊은 감정이다. 거짓, 부정의, 크고 작은 부당함, 철가면을 뒤집어쓴 자들의 뻔뻔함, 구태의연한 야비함, 수많은 이들의 외면과 침묵이 반복될 때, 그리고 그것이 변할 수 있다는 조금의 여지도 보이지 않을 때 환멸은 우리에게 온다. 세상이 부지런히 생산해내는 분노가 그 원인이 아니라 개인들의 무력함을 향할 때,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개인들을 좀먹으며 파멸로 몰아붙인다.
그 흔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적을 곳이 없었던 노동자의 유서는 그들이 단지 철탑과 거리로만 내몰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갑게 증언한다.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에조차도 짧은 감상에 젖을 틈조차 주지 않을 만큼, 그를 옥죄고 있는 질서는 기계와도 같은 정교함과 무자비함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놀라는 척도 하지 않는 자본의 무덤덤한 반응 속에서 그의 죽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아니 어쩌면 이미 셈해지고 있었을 죽음이었다.
그뿐일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했다는 죄로 고발을 당하고 소송을 당해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들을 주장하고 요구했다는 죄로 사회분열세력이나 폭력강성노조 같은 딱지를 붙여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는 꼬투리와 편법으로 설자리를 잃고 밀려나야할지 알 수 없다. 의기양양한 점령군의 얼굴을 한 이들이 쏟아낼 추악한 말들은 어떨까. 자유를 잃은 문화와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할 미학적 폭력들은 또 어떤가.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사온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면…”이라는 말에 “홍시라니 빨갱이구만!”이라고 응수하는 이들과의 피할 수 없는 ‘의사소통’을 우리는 어떻게 해쳐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파상공세와 더불어 우리를 환멸에 빠지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라는 시제의 실종일 것이다. 우리의 앞날이 괴로운 현재의 반복과 반복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지 않다. 노동소득을 통해서 중산층이 되거나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듣기 좋았던 사장님 소리도 쌓여가는 적자 앞에 한없이 초라해진다. “어차피 모두가 기회가 생기면 다 해먹을(은) 자들”이라는 성찰성속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은 강바닥 아래로 파고들고, 이념과 신념의 전선은 자칭 깨어있는 시민과 자칭 애국보수의 진력나는 말싸움 사이에서 표류한다. 먼 미래도, 가까운 미래도 잡히지 않는 가운데 서명을 기다리는 포기각서들만이 길게 늘어서 있는 일상을 니체가 인간이 견딜 수 없다고 단언했던 “이유 없는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자살이 환멸에 대한 하나의 극단적 대응이라면, 다른 한쪽에는 모든 연민과 공감과 감각들을 닫아걸고 괴물이 되는 길이 존재한다. 게다가 어느 쪽이든 그 파괴적인 결과들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결국 뭣도 없는 우리들이다. 그저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이 우리시대에는 이토록 어려운 과업이다. 전시도 아니건만,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저 살아만 있어달라는 말을 전한다. 모두들 부디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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