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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야생초 편지’ 저자

얼마 전 지방의 한 군립도서관에서 인문학 초청강연이 있어 다녀왔다. 청중의 면면을 보니 토박이뿐 아니라 도시에서 갓 이주한 귀농인도 꽤 눈에 띄었다. 강연 후 페이스북에 이런 감상문이 올라왔다. “요즘 같은 초스피드 시대에 한마디 하고 3초씩 쉬며 파워포인트나 동영상 자료도 없는 강의를 듣고 있으니 세월을 거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맥으로 보아 강연자를 폄훼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했던 이야기식 강연이 잘 먹혀들지 않은 것 같아 조금은 씁쓸했다.

한 번은 서울의 한 대학에서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인기강사의 대중강연을 참관한 적이 있다. 무대가 TV 쇼프로그램처럼 화려했다. 나 역시 그 무대에 서는 강연진의 일부였지만 왠지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강사는 각종 영상자료를 동원해 속도감 있게 강연을 이끌었다. 같은 강연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화면의 이동 속도와 말 사이에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온 듯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지금 머릿속에 몇 가지 영상만이 오락가락할 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이와 정반대되는 강연도 있었다. 미국 유학시절 뉴욕에서 스리 친모이라는 유명한 구루의 명상강의를 들었다. 무대 한가운데에 펑퍼짐한 의자가 하나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이윽고 강의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강사가 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와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인사말도 없이 눈을 반쯤 감고 명상에 잠기는 듯했다. 수백명의 청중도 자세를 고쳐 잡고 무대 위를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강사가 말을 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지 30분이나 지났을까 종소리가 울리더니 강의가 끝났다고 한다. 세상에나! 말 한마디 없는 강의를 들은 것이다. 청중은 수군대며 정말 명강의였다고 감탄을 했다.

 

생태운동가 황대권 l 출처:경향DB

얼핏 사기를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침묵의 강연’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강사가 의당 말을 하려니 하고 기대를 했기 때문에 침묵상태가 몹시 불편했다. 시간이 흘러 침묵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까 이제는 말로 인해 그 상태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졌다. 결국 말 없는 강연은 말 많은 이 세상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체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면에 한국 대학의 명강사는 영상과 말을 속도감 있게 펼쳐냄으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시간가는 줄 모르게 했으나 마음속의 울림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두 극단의 경우에서 보듯 말과 침묵의 적절한 조화는 명강의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방법론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장 훌륭한 교육방법의 하나로 ‘이야기’를 꼽는다. 지금 대한민국 50대 이상 성인의 어린 시절 교육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들으면 터무니없이 느리고 허술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스릴있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호흡과 몸짓이 극적인 효과를 더해 주었다. 이를 현대의 교실에서 재현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지만 그 옛날처럼 효과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이야기가 행해지는 무대의 세팅과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청중과 강사 사이에 찬바람이 불 정도로 멀리 떨어진 무대 위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해봐야 청중에게 내밀한 감정의 떨림이 전해질 리 없다.

디지털 문화와 대형 공연장에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겐 사랑방 좌담회가 딱이다. 그런 사람을 번쩍거리는 대형 공간에 불러내 감동을 주길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다. 화자와 청중의 교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작은 공간에서는 어눌함과 침묵조차도 때론 감동으로 다가온다. 청중이 강사의 그런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그런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계산된 속도와 소리의 강약, 시각의 변화무쌍함이 청중을 사로잡지 않으면 명강의가 될 수 없다. 서글프다. 우리는 기계가 감동을 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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