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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4일 발족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에 대한 논란과 관심이 뜨겁다. 8월1일 한국수력원자력 노조와 핵공학 관련 교수 등은 법적 절차를 문제 삼아 공론화위 활동중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같은 날, 공론화 추진방안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한국갈등학회 주최로 열리는 등 공론화 과정의 설계와 관리에 대한 논의도 시작되었다.

공론화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중립성이다. 공론화위 위원은 “중립적인 인사”(국무총리훈령 제690호 제3조2항)여야 한다. 7월31일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당정협의를 통해 탈핵 정책으로 “전력 수급에 전혀 문제가 없고, 전기요금 폭탄도 절대 없다”고 주장하자, 핵발전 찬성 측은 정부의 발언이 공론화 과정의 중립성에 영향을 미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공론화 과정의 중립은 어떤 것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가만히 있는 것이 중립인가? 찬반 양측이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공론화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핵발전 관련 정보는 정부와 생산자인 한수원이 일방적으로 제공해왔다. 당연히 핵발전에 유리한 정보일 수밖에 없다. 원전은 깨끗하고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 ‘원전 신화’가 탄생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최근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논의가 시작되자, ‘전기요금 폭탄’과 ‘전력 수급 심각한 차질’ 등의 자극적인 보도가 일부 언론을 통해 연일 쏟아져 나왔다.

공론화위는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적으로 공론화 과정을 설계, 관리해야 한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관심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통에 대한 방관이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 또는 가해자를 편드는 것이다. 불균형 앞에서도 중립은 없다. 불균형 상태를 방치하는 기계적 중립은 중립성을 훼손한다. 중립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론화위의 중립성은 시민들의 숙의에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을 요청한다. “국민 이해도 제고”(훈령 제2조3항)라는 공론화위의 기능도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론화 과정에 필요한 신고리 5·6호기 관련 정보에는 공학적, 경제적 문제와 함께 인간학적,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포함된다. 자연의 불확실성과 인간 실존의 한계로 핵발전사고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사고가 나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교훈이다. 공사 현장에 걸린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지역주민 생계를 보장하는 유일한 대책”이라고 쓴 현수막은 핵발전소 지역주민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보여준다. 결국, 핵발전소에 예속된, 피폐해진 삶만이 남는다. 아무도 원치 않는 핵발전소 내의 피폭노동은 하청노동자들의 몫이다. “정규직은 사고 현장에 오지 않는다.” 어느 하청노동자의 말이 아직도 아프다. 핵발전소와 송전탑은 쌍둥이다. 밀양과 청도는 송전탑 지역주민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생생히 보여주었다. 핵발전소의 가동으로 사용후핵연료가 쌓여간다. 최소 10만년을 보관해야 하는 이 고준위핵폐기물은 오롯이 미래 세대의 부담이다. 누가 핵발전의 안전성을 판단해야 하는가? 예측불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내재된 현실은 공학적 계산으로 얻은 수치보다 언제나 크다. 결국, 안전성 판단은 공학자들의 계산이 아니라 시민들의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공론화위는 핵발전 관련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도록 하고, 시민들의 숙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책무를 지고 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촛불과 광장의 참여로 극복한 체험을 간직하고 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숙의 형태의 참여로 에너지 민주주의 시대를 활짝 열자. 관건은 평평한 공론화장의 확보에 있다. 공론화위의 ‘중립’을 기대한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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