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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17년 ‘촛불항쟁’ 때 반블랙리스트 운동에 나선 문화예술인들은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를 꾸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검열과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을 조사했다. 그 결과 블랙리스트로 직간접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이 무려 8931명, 단체는 342개로 집계됐다. 마음을 크게 다친 문화예술인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단지 일부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가 아니라 정권이 ‘좌파 척결’ 따위를 명분으로 거의 전 장르에 걸친 문화예술계에 개입하여 자율성을 갖는 문화예술계를 인위적으로 바꾸고, 또 이런 작용을 통해 전체 국민에 대해 극우 이데올로기를 선전·유포하려던 ‘국가범죄’였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책동 같은 사안과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2008년 출범 직후부터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이 작성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2008·3)에 따라 국무총리실, 국가정보원, 경찰 등을 동원하여 언론과 문화예술계 전반을 사찰하고 검열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김기춘이 마치 대(大) 검열관 같은 역할을 하며 제 기분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나 작품들을 ‘좌파’로 재단하고 각급 권력기관을 써 간섭했다. 예컨대 2013년부터 국정원은 영진위와의 상시적인 채널을 만들고 영화작품과 제작현황 등을 수시로 요구하여 보고받았다. 시간이 유신시대로 돌아간 듯 가위질과 간섭이 영화 <덕혜옹주>, 광주비엔날레, 부산국제영화제, 국립극단의 연극 <개구리> <구름> 등에 가해졌다. 수많은 사례를 여기에 쓰지 못한다.

2018년 1월23일 대한민국 고등법원은 김기춘 징역 4년, 전 문화부 장관 조윤선·김종덕 2년, 청와대와 문화부에서 이들의 수족 역할을 수행하며 문체부 산하 기관을 압박하고 권력을 남용한 김상률·신동철·정관주·김소영 18개월 등 블랙리스트 기획·실행 고위 공무원 7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적지 않은 관련 공무원들이 징계를 받았다. 이런 일들은 김기춘 같은 노회한 인물들이 주도하고 검찰·경찰과 국정원·보안사 등에 오랫동안 밥을 먹어온 ‘생계형’ 냉전 세력과 하급기관의 중·하급 공무원들이 동원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예술계와 시민들은 촛불항쟁을 통해 이 같은 반민주적 퇴행에 저항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단죄하여 민주공화국의 근본과 문화예술의 가치를 지켜냈었다. 문화예술인들은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 연대 저항 행동을 하고, 또 그럼으로써 촛불항쟁의 시민들과도 굳게 연대했다.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검열 문제에 대한 원칙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문재인 정권의 탓도 크다. 안일하고 게을렀던 그들은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을 제대로 징치하지 않았다.

이렇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의 한국사회 일각과 공무원·정치인들의 기억상실증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다시 검열이 부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문화예술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교육·문화·예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늑대가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부천국제만화축제, EBS국제다큐영화제, 대전평생교육진흥원 등에서 검열을 당해 수상자나 프로그램이 바뀌었다. 부산 부마항쟁기념재단이 주최한 행사에서는 행정안전부의 공무원이 초청 가수의 노래 가사가 ‘VIP’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고 연출을 준비한 감독과 가수를 교체하게 했고, 교육부 공무원들이 ‘정치의 시간’ 운운하며 역사 교과서를 쓰는 학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어이없는 소식이 이어 들려온다.

대다수의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평범한 직장인이며 한국정치의 천박한 진영논리와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소위 ‘어공’이나 정치인 출신 고위직들은 다르다. 그들 중에는 문화예술계의 생리는 물론, 한국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치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며 철 지난 극우 이념으로 상식 밖의 일을 벌인다. 그들의 발호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교육·문화·예술의 수준을 깎아먹는다. 공무원들은 블랙리스트 사태의 교훈과 문화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문체부에 발한 ‘엄중 경고’를 새기고, 양심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따라 생각하고 처신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문화예술계와 시민사회단체들에 제안합니다. 예상되는 정권의 교육·문화·예술계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각종 검열 행위에 대한 대책 기구를 만듭시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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