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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이 숭숭 뚫린 몸을 끌고 판문점을 넘은 인민군 청년을 생각한다. 이름은 오청성, 올해 스물다섯. 반대였다면 이쪽에서도 국군 청년의 등을 향해 총을 쏘아댔겠지.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 국경에선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전 세계에 방송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국경은 없어요. 너의 나라 나의 나라….” 이매진 노래는 그래서 제목조차 ‘상상’일 뿐인가.

 

 

유재영의 소설 <하바롭스크의 밤>에도 비슷한 추격전이 나온다. 러시아 벌목공 탈북자 기라는 청년과 율이라는 청년. 벌목공으로 팔려나간 친구들은 하바롭스크의 폭설과 벌목 현장의 위험을 견디며 살아간다. “남한은 안전하오?” 대답 없는 질문. “늑대의 늪을 가로지를 거요. 같이 갑시다.” 감자를 입에 녹여 먹으면서 아무르강 유역을 걸어 탈출한다. 굶주린 검은 털빛의 늑대떼가 뒤를 쫓고… 곰덫이 그만 왼쪽 발목을 덥석 물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둘은 동굴처럼 생긴 방공호를 발견한다. 벌목공의 집이었는지 어느 실패한 혁명가의 움막이었는지 모르는 그곳. 철철 피가 흐르는 발목을 도끼로 자른 기는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선다. 방공호에는 엽총과 기의 발목이 달랑 남아 있었다. “이제 형벌은 끝났으니 당신의 삶을 사시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소.”

담양의 밤 또한 하바롭스크의 밤처럼 차갑다. 방공호 같은 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밤바람 소리가 마치 늑대 우는 소리 같다. 외롭게 살다간 이의 혼이 우는 소리일까.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맡았던 냄새. 독특한 바람 냄새. 건너온 자, 건너간 자들이 남긴 몸 냄새 같다.

김장배추를 다듬던 할매가 그랬다. “배추에서 단내가 나요. 인자 겁나 추울랑갑소.” 늑대처럼 사람도 냄새만 맡아도 알아차리는 게 많다. 자유의 냄새를 맡은 우리는 국경을 넘고 체제를 넘어 더 멀리 도망쳐야지. 총을 쏘든가 말든가. 사람은 죽여도 자유는 죽일 수 없다. 자유를 향한 이 갈망. 더는 분단과 총성이 없는 땅. 탈출다운 탈출을 이제 모두 각오할 때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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