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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면서 순천 효산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안준철 교사는 독특하게 수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바닥에 피어난 풀꽃을 휴대폰으로 세 번을 촬영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더 가까이서. 그것을 다시 컴퓨터로 옮겨서 수업자료를 만들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질문 하나를 던진다. 이 세 장의 사진은 내가 어떤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오늘 아침에 찍은 것인데, 그 단어는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A자로 시작하고 여덟 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정답은 ‘approach’이다. (안준철, <한 단어를 위해 출근길에 찍은 세 장의 사진>, ‘시사IN’ 7월25일자)

길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에 새삼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려는 교사의 정성이 돋보인다. 평소에 시선을 거의 주지 않는 미물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오묘한 세계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고 교사는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나태주의 ‘풀꽃’)는 시구(詩句)처럼,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관찰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은 것이다. 오로지 점수를 따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주입하던 단어를 생활의 문맥 속에서 끌어들이면, 파편화된 지식들은 경험으로 연결되고 구체적인 의미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그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앞으로 ‘approach’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풀꽃을 떠올리지 않을까.

‘approach’는 대개 ‘접근하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수업에서 보여준 사진 세 장을 놓고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다가가다’가 적합할 듯하다. ‘접근하다’와 ‘다가가다’ 사이에는 어감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내게 접근했다’와 ‘그가 내게 다가왔다’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전자에서는 그가 나를 대상화하는 느낌이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로 접촉하고 이용하려는 태도 말이다.


반면에 후자에서는 내가 인격적인 주체로 존중되는 분위기다. 관계와 대화의 동등한 상대로 자리매김되고, 마음의 중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접근하고, 누구에게 다가가는가. 내게 다가오는 이는 누구인가.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접근한 것임이 밝혀지는 경우, 어떤 심경이 되는가.

만사를 효용의 관점에서만 처리하고 타인을 수단화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세상이다. 그런 가운데, 어쩌다가 소통과 관계 자체가 목적으로 경험될 때 우리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서로를 의미 있는 타자로 만나게 될 때, 삶의 고결함을 문득 깨닫게 된다. 철학자 마틴 부버의 개념을 빌리자면 ‘나-그것’이 아니라 ‘나-너’의 구도로 연결되는 것이다.



강원도 정선 만항재에 핀 둥근이질풀꽃_경향DB


다가가야 할 상대는 사람만이 아니다. 출근길에 풀꽃 한 송이를 클로즈업한 교사처럼, 크고 작은 생명들에게 무심하게 다가가볼 일이다. 목숨이 없는 사물에게도 이따금 각별한 눈길을 주면 어떨까.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 그 자체로 기쁨이 되는 순간을 만끽해보고 싶다. 일상화된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 덕분에 우리는 수시로 영상을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고 전송하는데, 단 한 장을 찍더라도 대상에게 깊이 머물러 그 속살을 담아보자. 아니,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그냥 허허롭게 바라보자. 그렇게 다가갈 때, 저쪽에서도 불현듯 다가오는 무엇이 있다.

그러한 마주침은 피상적 인식의 장막을 거두어주기도 한다. 허형만 시인은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 (…)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들판처럼 황량해 보이는 세상,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삶, 체념과 냉소에 익숙해지는 마음….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출구는 있는가. 멀리서 관망하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로운 존재를 키워내려는 몸짓들에 돋보기를 들이댈 때, 변화의 동력은 더불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에 손을 내밀고 말을 걸면서, 가능성의 씨앗을 만져보고 싶다. 살아 있음의 존귀함을 일깨워주는 풀꽃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싶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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