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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어느 날 시냇가에서 말했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흐르네.” 맥락 없이 던져진 이 말의 의미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원천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 모든 웅덩이를 다 채운 뒤에야 나아가서 바다에 이른다.”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의 출처다. 학업을 할 때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야지 함부로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하는 말이다. 시간 들여 기초를 다지는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를 빨리 도출하는 것만 능사로 삼는 풍조가 개인의 학업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 곳곳에 만연해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뼈저린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저 허겁지겁 쌓아올리기만 하느라 여기저기 숭숭 뚫려 있는 구멍들이 눈에 들어와서 위태롭고 처참할 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웅덩이를 다 채워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물의 속성이지만, 채우고도 넘쳐서 더 나아갈 수 있으려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원천이 있어야 한다. 맹자가 강조한 것은 이 점이다. 우리는 잠시 좋은 말과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게 하는 원천이 깊지 않다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마치 장마철에만 가득 차서 흐르다 이내 말라버리는 도랑과도 같이. 시민사회와 정치집단이 추진하는 바람직한 정책들이 얼마 못 가 난관에 부딪혀 유야무야되거나 오히려 퇴행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난관을 뚫고 나아갈 만큼 깊은 원천이 없다면, 의도와 방향으로 인해 얻은 명성과 기대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도대체 얼마나 깊은 원천이 있어야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웅덩이를 다 채우고 바다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공자가 본 것은 거대한 강이 아니라 한 줄기 시냇물이었다. 원천이 아무리 풍부하다 하더라도 바다까지의 먼 길을 혼자서 갈 수는 없다. 각자 자신의 원천을 지닌 물들의 만남, 그 연대가 없이는 아무리 깊은 원천이라 해도 바다에 이를 수 없다. 단계를 온전히 밟고 난관도 이겨내며 끝내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원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서로의 빈 곳을 채우며 함께 나아가는 연대다. 길을 잃어버린 교육도 정치도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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