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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일로 보기로 했다가 역병 땜시 미뤄진 이혜미 시인과의 만남. 해가 지나고 그이가 쓴 먹방 에세이를 떠들어보니 당근이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청하네. 마침 나도 닭볶음탕을 해 먹을까 하고 당근을 한 개 샀는데, 정작 닭살이 좍 오른 닭의 살갗에 비위가 상해설랑 당근만 달랑 집어들고 왔어. 생으로, 아니 쌩으로 씹어먹어 볼까. 가끔 엄마가 카레 요리를 하다가 남은 당근 토막을 입에 넣어주신 기억. “당근을 손질할 때 끼쳐오는 향을 좋아한다… 덜 마른 흙의 냄새” 식탁 위의 고백처럼, 나도 당근 냄새가 좋아서 큼큼.

요리에는 주재료와 부재료가 있는데, 당근 같은 부재료는 요리의 향과 색을 돕는다. 잡채를 먹을 때도 붉은 당근이 잘게 썰어져 있으면 군침이 확 돌곤 해. 토끼나 말이 당근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쿨한 답, 맛있으니까 좋아하겠지. 나도 누구들처럼 영화를 보고 팝콘도 먹고 싶댔더니 “당근 말밥이지. 당장 극장엘 가자.” 사자성어가 아니지만 죄다들 쓰는 말인 듯.

누가 홍어 삼합을 사주겠다고 하면 당근 말밥, 누가 짜장면을 같이 먹자면 당근 말밥, 누가 좋은 와인을 갖고 있는데 같이 마실래 그러면 당근 말밥. 항상 준비된 대답.

동네 밭고랑에 산돼지 일가가 출몰하고 그래서 당근도 뭣도 안 심고, 몇 해 전 끙끙 옮겨 심은 포도나무 군락이나 어서 풍성한 알갱이로 내게 보답하길 바라는 중. 그러니 당근은 사다 먹어야 할 판. 이쪽 사람들은 싸우면 “새팍도 볼븐가 봐라” 이를 깨문다. 그 인간 사는 마당에도 가지 않겠다는 당찬 의지. 그러나 결국 그 말은 ‘자발이 읍게 된다’. 아이들이 어울리거나 하다못해 개들이 오가면서 말을 트고, 입술에 묻는 카레 한 접시면 다툼은 싱겁게 끝나버려. 물어보면 잔소리인 뻔한 경우가 많을수록 안온한 생이 흐르게 되지. 그러나 예측 불허, 예상 밖의 기이한 일들이 요샌 너무 많아. 돌연변이들의 세상이 되었나봐. 당연했던 일들을 검게 칠하고, 엉뚱한 판단들을 밀어붙인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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