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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휴일 아침, 눈이 몹시 내렸다. 이 기세라면 알록달록한 문명을 제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이대로 사흘만 쏟아져도 서울은 아득한 태곳적 서라벌로 변하고 남산은 그야말로 우뚝 돌발한 눈탑. 하지만 아무리 과장법을 동원하려고 해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의 여운을 찾아 남산터널 지나 인사동으로 나섰다. 아직 토막난 골목이 군데군데 숨어 있는 곳. 발자국을 몇 개 찍으며 늘샘 김영택 화백의 전시회를 보았다. 그야말로 수십만 획의 섬세한 선들이 지배(紙背)를 뚫을 듯 은모래처럼 반짝거리는 펜화. 안타깝게도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유고전이 되고 말았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소란스러운 인사동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긴다. 북망산으로 가는 듯 종로 지나 동대문 건너 동묘로 간다. 멀리 인왕산은 눈을 아직 받들고 있다.

휴일의 동묘는 대학보다 낫다. 고개를 들면 칠판 같은 하늘. 기이한 구름의 상형문자로 세상의 비밀을 적는다. 사람들은 모든 물건을 만지자마자 중고품으로 만드는 현묘한 기술을 가졌다. 동묘의 시간은 그 손때 묻은 것을 어루만져 골동품으로 다시 거두어들이는 재주를 부린다. 머리카락에도 결이 있다는데 나는 한 방향으로만 살아왔다. 사는 데만 급급하고 버리는 데는 나 몰라라였다. 그동안 피부처럼 밀착한 것들도 많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 그들은 언제 다 떨어져 나갔는가.

동묘 드나든 지 여러 해. 눈에 들어오는 품목들이 그때그때 달라진다. 불두, 필기구, 라디오 그리고 헌책. 최근 눈에 꽂힌 건 공사장에서 그 소임을 다하고 흘러나온 쇠뭉치들. 들면 세상의 무게가 묵직하게 손안으로 딸려오는 물건이다. 오늘 구입한 품목은 자루 빠진 곡괭이. 집 짓고 부술 때 묻힌 핏물 같은 녹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 빈 홈에 붓을 꽂으니 그야말로 난데없는 쓸모를 만났다. 네 생의 전반이 집을 짓고 부수는 일이었다면 이제부터 글을 짓고 쓰는 업에 매진하시길! 펜 대신 붓으로 몇 자 적고 산으로 못 간 아쉬움을 그런대로 달랜 하루.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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