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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학년이 올라가고 교실을 이동하는 시기.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되는 슬픔이 왔다. 정든 짝꿍과 헤어지는 와중에 새 교과서를 받는 은밀한 즐거움도 있었으니 국영수는 뒤로 미루고 체육과 미술, 지리부도를 즐겨 보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각종 신기록의 육상선수들과 알타미라 동굴 벽화. 모든 학창 시절을 청산하고 넥타이 매고 사회로 진입할 땐 여기도 한 동굴이 아닐까, 아득하고 캄캄했다. 남산터널에 버스가 갇힐 때도 있었으니 시계를 보고 창밖을 더듬으면 차의 꽁무니가 휘갈긴 치졸한 낙서뿐이었다. 어느 해 여름휴가에 접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수승한 그림들. 이런저런 자료와 체험을 바탕으로 짧은 글을 끄적여 보았다. 한 줄기 빛이 찾아드는 순결한 동굴. 마지막 점을 찍은 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로잡은 들소를 보며, 동굴 화가는 손뼉을 쳤다. 울타리가 없어도 도망가지 않는 사나운 짐승. 가난뱅이 무명 화가는 그림 속에서 먹이 한 톨 얻을 수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냥하러 나왔다가 여섯 대륙으로 흩어진 동굴 화가의 후예들. 고기맛의 문명에 너무 취했나. 옛집으로 가는 길을 까맣게 잃어버렸다.

연천의 선사박물관에 가니 이런 전시물이 있었다. 흙 속에 발굴된 완벽에 가까운 인체의 골격과 그 설명문. “약 6만년 전 어느 날.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서 한 남자가 매장되었다. 놀랍게도 매장 유적에서 몇 종류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는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엉겅퀴, 백합 같은 들꽃을 꺾어와 함께 묻었던 것….” 전봇대만 보아도 통통한 꽃줄기로 여길 만큼 꽃에 꽂혀 있던 때라 몇 번을 따라 읽은 엉겅퀴, 백합의 들꽃들.

새해 들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가 인도네시아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알타미라보다 약 3만년이 앞서는 멧돼지 벽화(사진). ‘얼굴에 뿔 같은 사마귀가 그려진’ 인도네시아 토종 멧돼지 그림을 혹시나 싶어 유심히 살폈지만 꽃은 없었다. 대신 엉덩이 부근에 낙관처럼 손도장이 뚜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섯 개의 손가락이 꽃잎처럼 피어난 인간의 손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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