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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70주년 추념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제주와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고, 12년 만에 대통령이 위령제에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유족과 생존 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밝혔으며, “4·3의 완벽한 해결을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보면 제주가 정권교체의 성과를 가장 두둑이 누렸다고 하겠다.

그러나 4·3유족회 등 4·3운동 쪽에서 70주년의 투쟁목표로 삼은 ‘정명’과 ‘미국의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4·3사건 당시 한국은 미군정 치하에 있었으며, 제주 민중에 대한 경찰의 포악질은 미군정의 감독 아래 이루어졌다. 1948년 한라산 입산 금지령이 반포된 이후에는 미 군함이 제주를 에워싸고 해안에서 5㎞ 이상의 입산 금지지역에 대한 함포사격으로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주도했다. 민중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묻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정명(正名)은 원래 공자가 한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며,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가 없다)에서 나온 말이다.

논어에는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이상적인 정치를 공자에게 묻자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답하는 대목이 있으니, 제각기 자기 명분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이다. 각자가 분수를 알고 틀을 넘지 말라는 봉건적인 신분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 4·3운동에서 말하는 정명은 김석범 작가가 말하듯이 ‘민중의 역사’의 관점에서 4·3사건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하고 “제주 평화공원에 누워있는 4·3 백비에 (정당한)이름을 새기고 바로 세우는 것”을 뜻한다.

93세의 재일동포 김 작가는 “제주 4·3 정명운동이 바로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했다. 그 내용인 즉 ‘미군정 3년과 이승만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친일파들을 끌어들인 엉터리 역사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자리매김’이라고 했다.

1999년에 성립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사건법)’에는 광주 5·18의 ‘민주화운동’처럼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 없다. 다만 2조(정의)1항에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했을 뿐이다. 즉 해당 기간에 일어난 폭력사태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며,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무엇 때문에 폭력사태가 일어났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 같은 엉터리들의 역사인 해방공간 3년의 역사의 절반은 엉터리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바로 통일 조국, 친일파 척결이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민주주의 운동이 제주4·3이었다는 정명을 백비에 새기는 것이다”라고 김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 정명운동이란 역사인식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 4·3사건은 오랜 역사를 통해 금기의 영역에 봉인되어 왔다.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신군부정권이 막을 내리는 1990년대에 겨우 논의를 시작하고 1998년의 ‘냉전과 국가테러리즘’ 국제심포지엄을 거쳐 1999년에 4·3사건법이 성립하면서 4·3사건이 비로소 공식공간에 등장했다.

그러나 입법을 추진한 4·3운동 측의 입장은 4·3사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백성들이 느닷없이 학살당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4·3운동 내부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무고한 양민학살설이고, 두 번째는 미군정의 민족분단과 반공 친일파 등용정책에 맞서는 ‘자주통일, 반미’ 항쟁이었다는 설이다.

실상은 당시 500여명으로 추산되는 남로당 제주지부 및 무장대의 지도핵심은 해방공간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인민위원회 결성 등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등 깨어있는 집단이었으며, 3만명이라는 4·3 희생자의 많은 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4·3사건법 성립 당시 자유민주주의(반공) 체제하에서 합법공간의 확보가 선결 문제라는 현실주의에 밀려 ‘양민학살설’이 주류를 차지하고 통용되어 온 것이다.

70주년 추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에 제주에 많은 선물을 가져다주었으나, 역사인식에서는 낡은 ‘양민학살설’에 머물고, ‘양민’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사용한 점이 아쉽다. ‘양민’이란 지배자의 눈높이에서 백성을 양민과 비‘양민’으로 나누어 비‘양민’은 죽여도 된다는 함의가 있어서, 요즘 학회에서도 운동권에서도 ‘민간인’이라고 하지, ‘양민’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제주에서 학살이 자행되어 그 기억까지 말살된 다음에 4·3이 명맥을 유지해 온 곳이 2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정치난민들이 피란 간 일본이었다. 1950년대 재일동포사회에서는 4·3을 ‘인민봉기’ 또는 ‘인민항쟁’이라고 하는 선구적인 간행물들이 나왔다. 김석범 작가는 4·3사건을 인민(민중)항쟁이라는 데 초지일관하고 있으니, 이번 ‘민중항쟁’설의 부활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20년 전에 김석범 작가와 몇몇이 도쿄 신주쿠에서 술자리를 함께했다. 거기서 한 재일제주인이 “제주 4·3 비극의 책임은 군사모험주의에 치달은 남로당에 있다”고 하자, 김 작가는 그 말을 가로막고 “남로당도 책임이 있겠으나, 제주 4·3의 학살을 용인하고 제주에 함포사격을 가한 미국놈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열화와 같이 화를 내고 꾸짖은 것을 기억한다. 그 후에도 4·3운동의 선각자 김명식씨 등의 입장도 ‘인민항쟁설’이다.

‘항쟁설’은 그간 권력에 의해 압살되어 왔으나, 운동 측의 자기 검열과 자기 규제에 의해 금압되어 온 면도 있다.

그러니 4·3운동의 목표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전면적인 재인식과 연동되는 장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서승 평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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