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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엔 다양한 경향이 존재했다. 실추된 보수의 명예를 고민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자본주의 극복을 꿈꾸는 사람들까지. 그러나 가장 주요한 경향은 역시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들, 국가의 정상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국가의 정상화는 흔히 대한민국 헌법 1조를 되새기는 일로 표현되곤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많은 사람들을 가슴 뛰게 하지만 사실 헌법 제1조는 그 자체로 특별하진 않다. 가령 박정희의 유신헌법 제1조는 이렇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한국 헌법 제1조는 20세기 헌법의 기초라 일컬어지는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따른 것이다. “독일제국은 공화국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은 나치 집권의 빌미가 되었고 2차 대전 후 독일 헌법 제1조는 바뀌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공허함은 정치 언어의 속성이자,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하고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잉여 생산물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주요한 두 계급을 구성한다. 그러나 노예제나 봉건제에 비해 계급 관계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 이른바 민주주의 정치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투표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정치적 독재를 물리쳐도 실제 삶은 달라지지 않는 미심쩍은 경험조차도 믿음을 쉽게 흐트러트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의 정상화를 말하기 전에, 국가의 정상화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의 정상화는 단지 정치적 민주주의의 회복인가? 아니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 자유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시장 자유를 통제하거나 관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립한다.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에 관련해서도 둘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라면 둘은 꽤 행복하게 합작할 수 있다. 모두 재벌 덕이다.

재벌 문제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제다. 재벌이 자유 시장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정권을 막론하고 독점적 성격을 강화해온 한국 재벌의 매출은 근래 국내총생산(GDP)의 85%를 넘어서게 되었다. 중소기업은 거의 대부분 재벌에 하청 계열화되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차이가 갈수록 커지고 청년들 앞에 비정규직 노동만 존재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재벌의 독점 상태를 유지 강화해주는 게 국가이기에 공무원과 공기업 노동자는 대기업 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누린다.

재벌 독점 지배로 한국 사회는 1:9:90의 구조를 보인다. 1%와 그 체제를 지탱하는 9%, 그리고 나머지 90%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 가계부채 증가율 1위, 남녀 임금격차 1위, 노인 빈곤율 1위, 저임금계층 비율 1위 등등 끝없이 나열되는 이른바 ‘헬조선’의 지표들은 이런 극단적 독점 상태에 기인한다. 최순실 게이트 혹은 박근혜의 국정농단도 독점 상태가 길러낸 독버섯이다. 최순실은 충분히 처벌받아야 하고 박근혜는 퇴진해야 하며 새누리당의 재집권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다 이루어진다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특정한 개인이나 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있고, 최순실과 박근혜, 새누리당은 물론 야당 역시 국가 독점 재벌 체제의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맥락이 무엇이든 재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경제민주화론은 재벌과 국가의 유착이 문제이니 시장에 맡기자는, 이름과는 달리 경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그게 재벌을 국가 대신 국제 투기자본에 넘기자는 거라 비판하며 재벌과 사회적 대타협을 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국 재벌은 그런 타협이 가능할 정도로 합리적이거나 유연하지 않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가 타협적 방식으로 개선하려 해도 격한 충돌이 불가피하듯 한국 재벌이 그렇다. 연기금을 통한, 혹은 국영화 방식의 재벌 사회화는 원론적으론 급진적인 방법이지만, 한국 재벌에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재벌의 사회화가 정말 가능할까?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음을 확인한 건 광장의 가장 큰 소득이다. 박근혜 퇴진을 외친 200만명이 재벌 사회화를 외친다면 단박에 구체적 상황으로 진척될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서 이재용의, 무중력 상태의 유영 같은 태도 또한 그걸 염려해서다.

일단 상황은 물 건너간 듯하다. 청문회 이틀 후 삼성전자 주가는 179만원으로 최고가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우병우를 골려준 의원에게 환호하거나 야당의 대선후보들을 비교하는 일에 열중이다. 긴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두 번째 걸음을 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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