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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1976)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어느 날 이탈리아 농촌 마을에서 각각 소작농과 지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올모(제라르 드파르디외)와 알베르토(로버트 드 니로)의 우정과 일생을 그린 영화다. 5시간이 넘는 영화지만 장면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두 배우가 출연했다는 건 기억했지만 그마저도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저렇게 생겼었구나’ 싶었다. 덕분에 마치 처음 본 영화처럼 영화 속 현실을 오늘 현실에 비추어가며 볼 순 있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영화의 끝 무렵, 1945년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에게서 해방되고 지주 알베르토는 소작농들에게 체포되어 둘러싸인다.

올모는 말한다. “우리가 너를 비난하고 과거가 너를 비난하고 있어. 이제 지주는 없어. 지주는 죽은 자야.”

무력한 얼굴로 “난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 읊조리는 알베르토에게 소작농들이 다가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라면 난 죽은 사람을 보는 거네.” “이 친구 살아 있어, 몸이 뜨거워. 시체는 차가워지는 법인데.”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에겐 그가 죽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소작농들은 마치 노래하듯 목숨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올모를 굳이 죽이지 않음으로써 실은 이미 죽은 사람임을 내내 진열하기로 한다.

우연치곤 묘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던 것이다. “목숨이란 무엇인가?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었지만 목숨은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몸은 죽은 지 수백수천 년이지만 여전히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며 행동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농민 백남기는 살았고 의사 백선하는 죽었다. 백선하는 실은 자신의 사망 진단을 했다.”

신약성서 복음서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목숨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복음(하느님나라 운동)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목숨이 있음을 말한다. 예수는 육체의 목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정성으로 대하며 치유하곤 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육체의 목숨과 그에 관련한 삶의 가치들이 전부인 양 집착할 때 사람은 진정한 목숨을 잃는다. 예수의 부활 사건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예수의 부활이 단지 예수의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사건이라면, 뿔뿔이 도망쳐 예수와 관계마저 부인하던 제자들이 갑자기 돌아서서 죽음을 두려워 않고 예수의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죽은 육체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건, 단지 육체가 사흘 동안 노화를 멈추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가 말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는 사건이었다.

<1900년>에서 소작농들은 제 노동으로 평생 지주만 배 불리는 일이 하늘이 정한 운명이 아님을 깨닫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불의한 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일이 아니다. 목숨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물론 그들은 충분히 단련된 투사나 지사가 아니기에 늘 용감하기만 할 순 없다.

파시스트 패거리가 그들 중 한 사람을 보란 듯 린치할 때 그들은 두려움에 움츠러든다. 보다 못한 그들 중 하나가 피해자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가다 총에 맞고 쓰러진다. 한 여성이 제 가슴을 풀어헤치며 항의하다 역시 쓰러진다. “총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친 사람이 쓰러지고, 누군가가 그들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한다. 차례로 총을 맞고 쓰러지지만 휘파람은 멈추지 않는다.

목숨을 그렇게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제 신념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정연한 성명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고작 휘파람을 불다 죽어가는 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휘파람은 ‘나는 살아 있다’는 확인이자 ‘너희는 이미 죽었다’는 선언이다. 그들은 그렇게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목숨을 얻는다.

2016년 한국의 백남기도 그렇다.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이름을 전에 들어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담긴 저작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결코 유명 인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단지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로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존경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

목숨의 의미를 잊지 않는다고 해서 다 성인(聖人)이 되는 건 아니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되거나 당장 육체의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사람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존경과 추모의 대상으로 삼아 내 삶으로부터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내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현실이 어쩔 수 없지’ 할 때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세상을 바꿔내야지’ 마음먹는 것이다. 수많은 살아 있는 시체들 속에서, 내가 정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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