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레드 문

opinionX 2022. 10. 17. 17:37



미아보호소에서 데려온 4년 만의 휴가라는 녀석이 이불을 당겨 덮으면 나도 잠시 마음을 놓고 창틀에 와 닿는 가을비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도시 가득 기계들이 계속 돌아가고 어머니는 프라이팬에 돼지비계를 얹어 기름을 내고 이 순간에도 타인의 손이 가동됩니다 나는 휴가라는 녀석과 놀아주는 방법을 오래전에 잊어버려서 휴가를 깨우지 못한 채 누워 있고 녀석이 일어나면 돼지기름에 바짝 볶은 짜장 소스로 밥을 비벼 늦은 아침을 먹으려 합니다 비가 내리고 있어도 가루세제처럼 살갗이 까슬한 시간 동료의 손이 가동됩니다 신의 정밀한 기계처럼 지구가 오차 없이 돌아갑니다 지구의 얼굴 반쪽은 늘 검은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엔 손바닥 붉은 목장갑처럼 달이 떠 있습니다 한 손에 달을 낀 지구가 작업을 계속합니다

최세라(1973~)


4년 만에 휴가를 얻었는데 즐기는 법을 잊어버렸다. 겨우 창틀을 두드리는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늦은 아침까지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할 뿐이다. 어머니가 “프라이팬에 돼지비계를 얹어 기름을 내” 짜장 소스를 만든다. 고생하는 자식을 위하는 사랑이다. 시집에는 편의점, 피자가게, 이삿짐센터, 콜센터,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등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등장한다. “애써 걸으며 흔들렸던 날들의 기록”이라는 시인의 말에서 삶의 풍랑을 짐작할 뿐이다.

시인이 휴가를 가도 일터의 기계는 계속 돌아간다. 휴가로 생긴 공백은 남아 있는 동료들의 몫.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기계의 부속품이 되었다. 시인은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지구에서 “오차 없이 돌아”가는 노동의 속성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떠올린다. 한낮의 노동으로도 부족해 밤까지 일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붉은 목장갑을 낀 관리자는 붉은 달 같다. 출구는 없고, 쉼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산다.

<김정수 시인>

 

 

연재 | 詩想과 세상 - 경향신문

 

www.khan.co.kr

 

'일반 칼럼 > 詩想과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젊은 나에게  (0) 2022.10.31
가죽 장갑  (0) 2022.10.25
  (0) 2022.10.11
짧은 그림자  (0) 2022.10.04
안양  (0) 2022.09.26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