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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안양

opinionX 2022. 9. 26. 10:55



뒷모습 없는 다정은 당신이 잘한다

늦저녁에도 불빛으로 환한 이곳에서
예전에는 다 논하고 밭뿐이었다고
당신에게 일렀다던 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절로 당신의 아버지 또 할머니와 할아버지
당신하고 성씨를 같이 써서 다정한 얼굴들
명절날 모처럼 벅적이는 가정집이 떠오르고

초승달을 마저 가리는 사람을 끝까지 보며
사람의 앞모습 하나로 감지되는 세상을
입으로 사랑한다 말한 사람을 내가
정말로 사랑하게 된 타향의 밤에
딱 하나 켜지는 가정집 불빛은
이제야 막 들어왔다는 것

전욱진(1993~)


이 시는 따뜻하고 다정한 듯하지만 어딘지 쓸쓸하다.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의 삶을 먹먹하게 그리고 있다. 타향인 안양에 정착하느라, 가족을 부양하느라 애쓰는 당신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늦은 귀가에 늘 입으로만 “사랑한다”는 당신에 대한 원망과 반항도 감지된다. 마주 보고 애써 웃음 짓고는 어깨 축 늘어뜨린 채 걷는 뒷모습은 어떤 표정이나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는 사람을 배웅하거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때 보는 것이 뒷모습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표정은 숨길 수 있어도 뒷모습은 감출 수 없다. 거의 본 적 없는 당신의 뒷모습은 낯설다. 가족이 잠든 밤에 귀가하거나 타지로 돈을 벌러 가 명절에나 들르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는 당신의 얼굴은 다정한데 왠지 슬프다. “초승달을 마저 가리는 사람을 끝까지 보”고, 점점 왜소해지는 뒷모습을 앞모습에서 발견하고야 비로소 당신을 이해한다. 한밤에 들어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며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운다.

<김정수 시인>

 

 

연재 | 詩想과 세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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