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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는 덜 가지만 영화는 더 보고 있다. 매달 얼마를 내면 수백편의 영화를 언제고 틀었다 끌 수 있으니까. 그래서 거실에서, 리모컨을 옆에 놓고, 시큰둥한 마음으로 본다. 이제 나는 한 편의 영화를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폭군 같은 자유를 누리게 됐는데 나와 영화의 관계는 왜 점점 공허해지는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출판프로젝트로 기획된 단행본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리모컨을 들고는 도저히 영화만의 ‘시간’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영화는 시간 체험인 것이다. 상영 시간을 끊지 않고 버텨 내며 끝을 보는 시간 체험이 내겐 영화다.”(김희정 감독)

우리는 왜 극장에 가는가. 나는 나에게 영화를 보여주러 간다. 나는 어떤 영화를 보기 어려워한다. 세계를 똑바로 보게 하고, 마음을 힘들게 하고, 눈물이 나게 하고, 눈물이나 흘리고 마는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영화들. 머리는 그것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몸은 핑계를 대며 미룬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을 데리고 극장에 가야 한다. 끝까지 보기 위해서다. 내게 극장은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까지 봐야 할 영화라는 게 있는가? 내게 영화는 (간접적일지언정) ‘경험’이고 문학은 (비개념적일지언정) ‘이해’다. 타인의 삶을,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 경험하고 문자적 반추를 통해 이해한다. 이해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고 경험 없는 이해는 공허하다. 그래서 ‘봐야 할’ 영화라는 게 있다. 그것도 극장에서 말이다.

집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허락된 일 중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영화를 안 보는 일이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 들어가 영화의 메뉴판을 펼친다. 시식하듯 몇 분을 보고 다음 영화로 넘어간다. 그 일을 반복하다 보면, 시작은 했으나 끝은 못 본 영화가 쌓인다. 이유는 언제나 하나다. 오늘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기에는 내 삶이) 너무 피곤하다는 것. 그러니 얼을 빠지게 하고 넋을 잃게 하는 영화만 틀어놓게 된다.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영화와의 관계가 세계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어느 철학자의 말마따나 이제 세상은 영화가 되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은 끄고 흥미로운 세상만 튼다.

리모컨을 든 폭군의 자유를 누리며
우린 흥미로운 세상만 골라 튼다
영화도 현실도 잊혀질 때는 비슷
현실의 비참은 일시 정지되지 않고
그냥 방치될 뿐이다

두 명의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4월22일 평택항에서 산재 사고로 사망한 이선호씨와 4월25일 한강변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사망한 손정민 씨. 둘 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그러나 청년 노동자의 죽음에 언론은 2주 동안 침묵하다 뒤늦게 보도를 시작했고 의대생 청년의 죽음에는 과도한 양의 보도를 쏟아냈다. 이럴 때 대중은 언론을 욕하지만 언론도 대중을 욕하고 있을 것이다. 공급이 수요를 왜곡하지만 그 반대도 진실이다. 자극적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 수요에 부응해 기사가 쏟아진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중은 ‘한강 의대생’을 100번 검색하는 동안 ‘평택항 알바생’을 2번 검색했다. 전자에는 미스터리가 있지만 후자에는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의 장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독립영화처럼 지루한’ 것이리라. 김용균은 2018년 12월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졌다. 네 시간 동안 아무도 몰랐고, 발견된 뒤에도 네 시간을 그렇게 있었다. 김태규는 2019년 4월10일 아침, 5층 높이 화물용 승강기에서 추락사했다. 안전모와 안전화 없이 죽은 것은 그가 일용직이었기 때문이다. 김재순은 2020년 5월22일 파쇄기에 끼여 사망했다. 영세한 업체여서 노동자의 안전에는 쓸 돈이 없었다. 이선호의 죽음은 이 청년들의 죽음을 잇는다. 2021년 4월22일 오후에 300㎏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사건 발생 2주가 지나도록 대다수 언론이 기사를 쓰지 않았던 것은, 이 죽음이, 관객이 없는 현실의 네 번째 속편쯤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버려질 때 둘은 비슷해진다. 작은 영화가 큰 영화에 밀려 상영관을 잡지 못하듯이, 반복되는 현실은 새로운 현실에 밀려 기억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앞서 인용한 책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장르를 막론하고 영화는 타인의 삶을 발견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었고, 그 노력을 통해 우리를 서로 연결시키는 통로였다.”(다큐멘터리 작가 김옥영)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보기 버거운 영화에 그러듯이, 어떤 현실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 연결되기보다는 분리되기를 원하는, 리모컨을 든 폭군의 자유. 물론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현실의 비참은 일시 정지되지 않고 빨리 감아지지 않는다. 그냥 방치될 뿐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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