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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세 개의 층위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죽음.

첫째, 나의 죽음. 이것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그러나 내가 소외되는 사건이다. 나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내 삶의 가장 치명적인 진실을 알게 하되 그에 응답할 시간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인생을 돌아본 이후에야 자신이 그동안 잘못 살아 왔다는 “끔찍한 진실”을 깨닫지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진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진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에 가까이 가되 죽지는 않고 진실만 챙겨오는 체험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바로 앞에 철제빔이 떨어져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피한 날 오후에 직장을 떠나 은둔해버린 <몰타의 매>의 한 등장인물처럼 말이다. 대개는 그럴 수 없으니 그저 나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오래된 철학적 가르침을 다시 음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티브 잡스가 그랬듯이, 나의 죽음에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내일 죽는다 해도 이대로 살 것인가, 하고.

광주서 일어난 철거 건물 붕괴
또 한번의 ‘우리의 죽음’이었다
비용 절감이 불러온 ‘사회적 참사’
단 한 사람도 죽어선 안 된다며
돈 쓰는 기업이 있는지 묻고싶다

둘째, 너의 죽음. 이것은 남겨진 사람이 겪어야 하는 사건이다. 어떻게 너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너를 떠나보낼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잊으려 하면 잊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기억하려 해야 한다고, 그를 향한 내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라캉은 ‘내게 소중했던 그’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소중했던 나’를 포기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한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애도 기간이라는 말이 있으니 애도 작업에도 끝은 있을 것이다. 이 지난한 노동은 언제 끝나는가. 대리언 리더는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드디어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한 여성의 사례를 보고한다. 그 여성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리다는 이유로 작별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받았다. 그런 그가 장거리 연애에 빠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연애에서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매주 행해진 작별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셋째, 우리의 죽음.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주어가 아니다. 내가 포함된 ‘우리’가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타인들의 죽음을 ‘우리’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하는 죽음은 많다. 국가폭력, 현행법상의 재난, 산업재해에 의한 죽음들. 이 죽음 앞에서 ‘우리’가 구성되고 사명도 발생한다. 진상을 규명하는 일, 책임 소재와 피해 규모를 가려내고 처벌과 보상을 집행하는 일, 죽음에 적절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애도를 제도화하는 일,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현실의 구조를 불가역적으로 바꾸는 일.

이 일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수용소 생존자들이 소위 ‘생존자의 죄책감’을 느꼈던 것처럼,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느끼는 그것을 시민적 죄책감·수치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감정으로 사람들은 싸운다. 1980년 5월 이후에도, 2014년 4월16일 이후에도 싸웠고, 지금 여기에서 잇달아 죽어가는 청년 노동자들과 여성 군인들을 위해서도 싸울 것이다.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 죽음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철거 현장 건물 붕괴 사고의 현장은 내 직장과 거주지 모두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이 사건을 ‘나의 죽음’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내가 해당 시간에 그곳을 지났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상상해 보는 일이다.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무례한 상상이다. 실제로 그곳을 지나다 사망한 아홉분의 고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내게 ‘너의 죽음’으로 경험됐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합동분향소에 다녀올 수야 있지만 ‘너’를 잃은 유족들의 비통함에 이를 수는 없으니까. 인접한 곳에서의 비극이라도 건널 수 없는 간극은 당연히 있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또 한 번 ‘우리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말뿐이다. 역시나 비용 절감을 위한 편법 철거가 낳은 참사였다.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될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산재는 언제고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처벌하면 기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틀렸다. 그것은 최선을 다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기업들은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는가? 처음부터 사람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돈을 아끼는 기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돈을 쓰는 기업은 있는가. 이 둘은 전혀 같지 않다. 이 차이를 곱씹어야 ‘우리의 죽음’이 멈춰질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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