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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마음운동

opinionX 2019. 12. 24. 10:35

차를 마시다 친구에게 불쑥 “아무래도 마음운동을 해야겠어”라고 말했다. “마음잡고 운동을 하겠다는 말이지?”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말이 잘못 나간 것이다. 그걸 제대로 알아들은 친구가 신통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요즘 들어 체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글쓸 때 절감했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았다. 덩달아 집중력도 떨어졌다.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었다. 동사가 실종되고 조사가 자리를 잘못 잡았다. 며칠 좀 쉬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휴식만으로는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마음을 잡아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걸었다. 내친김에 걸어보자는 심산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징검돌에 발을 디딜 때,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오를 때 아까 잘못 나간 말이 떠올랐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마음운동. 마음운동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몸의 체력 못지않게 마음의 체력도 중요하니 말이다. 마음운동을 해야겠다는 말은 어쩌면 실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마음의 체력이 약해지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는다.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평소에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아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럴 때 마음의 근력은 유연한 태도를 갖게 해준다.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도와준다. 마음의 지구력은 힘든 일이 있을 때 특히 빛을 발한다. 어떻게든 나를 일상에 붙들어 매주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발 또 한 발 내딛게 해주는 것도 마음의 지구력이다. 하루를 살아내는 힘이 모이고 쌓이면 삶은 더 이상 살아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올해 내가 가장 길게 품었던 마음은 상실감이었다. 상실감의 끝에는 늘 무기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력해질 때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었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슬픈 이야기는 나를 더 슬픈 상태로 몰아넣는 대신,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연대하게 해주었다. 이야기 속에서 묘사되는 다양한 슬픔의 양상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독서가 끝나면 이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있는 사람을 찬찬히 그려보았다. 상실감이 나를 압도하고 잠식하지 않도록 나는 마음운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상실감은 커다란 감정이어서 어떻게든 다스리기 위해 애쓰는 반면, 일상에서 불쑥불쑥 비집고 올라오는 감정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내게는 섭섭함이 그랬다. 섭섭함은 으레 관계에서 비롯하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크기와 무게를 재기 때문이다. 섭섭하다는 것은 모자라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자람을 판단하는 건 전적으로 마음의 소관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지만, 결정(結晶)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함은 분함이나 노여움에 가닿기도 한다. 얼어붙은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제어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마음은 뭉게뭉게 치밀어 나를 억누르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고 무게도 없는 어떤 것이 나를 뭉갤 수도 있다. 마음은 재화가 아니다. 매번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교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때 내가 건넸던 마음을 그대로 남겨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손상되지 않은 의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상대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도, 섭섭함을 메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골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섭섭함을 받아들이는 순순함이다. 언제 어디서든 섭섭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마음운동의 마지막 단계에는 단단한 자아가 있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저문다는 것은 해가 져서 어두워짐을 뜻한다. 어두워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불과 빛, 그리고 불빛의 귀함을 깨닫는다. 상실감에 휩싸였을 때, 있었던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이 아플 때,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마음이 경직되었을 때, 마음에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아무래도 마음운동을 해야겠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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