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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뉴스 페이지를 열면 우울한 얘기투성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삼킨 28살 청년 노동자 이야기며, 부자 동네 강남이 세금은 제일 안 낸다는 통계, ‘오류투성이 국정 교과서’ 소식. 거기에 홈플러스 인수전에 뛰어들어 논란이 된 국민연금이 지난해 가장 많이 투자한 주식 종목은 삼성전자라는 뉴스까지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가운데 순식간에 화가 솟구친다.

심지어 220억원을 들여 만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족문화사전)에 친일부역자들이 독립운동가들로 둔갑해 있더라는 소식까지 더해지니 금방이라도 마음에 몹쓸 병이 날 것 같다. 그래, 그렇지. 그게 바로 ‘11년째 내내 자살률 1위’를 지킬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는 거지, 하며 남의 얘기인 듯 냉소하게 된다.

하지만 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보다는 되레 ‘개 발바닥만 들여봐도 너무 좋아서 더럽게 오래 살고 싶다’고 했던 어느 노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인생 구석구석을 가능하면 더 많이, 더 오래 음미하자는 주의다. 그 때문에 사실은 냉소랑도 별로 안 친하고 싶다. 우울증은 정신 건강에 나쁘고, 냉소는 두뇌 건강에 해롭다. 진짜다. 냉소적인 불신을 가진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점심엔 뭘 해 먹을까 생각한다. 오징어랑 양배추, 청량고추 팍팍 썰어 넣고 매콤하게 끓인 해물짬뽕이 어떨까? 아니면 통새우와 마늘을 넣은 올리브 오일 파스타? 아니다. 얼마 전 평창군 농업기술센터에 갔다가 어느 책자에서 봤던 비빔국수 생각이 난다. 정확히 복숭아 열무김치 비빔소면. 평소 자주 해 먹던 열무김치 비빔국수 조리법에 인근 농가에서 생산된 복숭아 두 개만 보태면 된다. 복숭아 하나는 강판에 갈아서 양념장에 넣어주고, 다른 하나는 채 썰어 열무국수와 같이 설렁설렁 무쳐주면 된다. 이마에 땀이 나도록 육체노동을 하다가 문득 그 생각을 하니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입 안에 침도 고이고.

<런치 박스>라는 제목의 인도 영화가 생각난다. 잘못 배달된 도시락에 얽힌 사랑 영화였는데 특별히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영화 <런치박스>_경향DB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지옥철, 지옥버스를 타고 50년 가까운 세월을 아등바등 서서 출퇴근했다는 남자가 땅값이 올라서 묘지에 들어갈 관조차 세로로 맞추어야 한다며 푸념하는 대목이다. 죽어서도 앉거나 누울 수가 없는 거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오늘날 단테가 살고 있다면 <신곡>의 지옥편 개정판에 현대 대도시의 생활 양상을 집어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그릇의 음식이, 그리고 조그만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한 조각의 사랑과 관심이 너나 할 것 없이 비참하고 비루한 우리의 일상을 보다 살 만한 것이 되도록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다는 거. 그게 바로 영화의 핵심이었던 것 같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도 생각난다. 물류 창고 같은 곳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봐서 주인공 이치코는 도시에서 흔해 빠진 변변찮은 청춘이다. 그런 그녀가 눈이 내리면 고립되기 십상인 첩첩산중 고향 마을로 돌아가 살기 위해 요리도 하고 농사도 짓는 이야기다. 그것도 혼자서. 그런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씩씩할 수가 없다. 심지어 연신 군침이 도는 가운데 고귀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학창 시절 갑자기 사라져버린 엄마. 그때부터 줄곧 혼자 요리하고 혼자 먹었던 모양인데 스스로를 위해 제철 재료를 마련하고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여 요리라는 과정에서 건강하고 단단한 자기애가 느껴진다고 할까? 심지어 돈 없는 청춘이 제 손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역시 판타지인가, 싶기도 했고.

<여행하는 나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가 그랬다. 우리 인류에게는 ‘오늘 아침 신문에 무엇이 실려 있었고, 나의 친구는 누구이며, 누구에게 빚이 있고, 또 누구에게 얼마의 돈을 빌려줬는가를 잊어버릴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마음의 안식을 되찾을 수 있는 곳. 말하자면 마음의 고향 같은 곳 말이다.

모르겠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암담해 보여도 난 먹는 것 때문에도 자살하고 싶지 않다. 정확히 정성껏 요리해서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 때문에도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특히 제철 식재료가 지천인 시골에서는 더욱 그렇다. 방금 전 수확이 끝난 이웃의 양배추밭에서 삶거나 튀겨 먹을 만한 새싹을 한 바구니 가득 따왔다. 그런가 하면 뒤뜰에는 해도 잘 안 드는 곳에 겨우 세 그루 심었을 뿐인데 얼마나 많은 꽈리 고추가 열렸는지 즐거운 비명이 흘러나올 정도다.

“이것 봐. 한 뼘 땅 뙈기가 완전 보물 창고라니까. 이렇게 많이 열렸다니. 이렇게 예쁘게 윤기 나는 꽈리 고추가! 오늘은 이걸로 뭘 해 먹을까?”


김경의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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