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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장군이자 전쟁 이론가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정치의 도구이다. 국제 관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본질을 꿰뚫은 표현으로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그가 분석한 전쟁의 본질과 의미는 결국 피아의 구별에서 시작한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가 분명해야 공격과 방어의 상대가 정해진다. 그래야 전쟁의 승리와 패배 주체도 명확해진다. 

그런데 최근 적군과 아군 모두를 패배의 길로 인도할 ‘이상한’ 전쟁이 벌어졌다. 무대는 유럽 발트해다. 지난달 26일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옮기는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이 파손되며 가스가 누출됐다. 노르트스트림이 망가진 원인으로 지목된 건 ‘폭파’다. 누군가 일부러 파괴했다는 뜻이다. 노르트스트림은 러시아와 유럽을 경제의 관점에서 묶는 끈이었다. 이번 일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연관된 누군가가 벌인 군사작전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여기서 전 세계인이 주목할 부분이 있다. 폭파로 인해 단순히 가스관만 손상된 게 아니라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이 대기로 다량 누출됐다는 점이다. 지난달 28일 미국 과학계에선 메탄이 총 50만t 지구 대기에 섞여 들어갔을 것으로 예상했다. 역대 최대 누출량이다. 201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있었던 천연가스 누출 사고 때 대기에 방출된 메탄 분량의 5배다.

메탄의 대기 유입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강력한 온난화 유발 때문이다. 이산화탄소보다 20배 강하다. 메탄은 주로 소나 양의 트림, 쓰레기,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강력한 온난화 유발 때문에 최근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글로벌 메탄 서약’을 맺었다. 2030년까지 전 세계 메탄 배출량을 2020년 대비 최소 30% 감축하는 게 목표다. 이 서약에는 지난해 한국도 가입했다. 한쪽에선 메탄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중한 상황에서 인간 스스로 멀쩡한 가스관을 파괴해가며 역대 최대의 메탄을 대기 중에 쏟아부은 것이다. 

이번 메탄 누출의 결과가 온난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자세히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아도 될 온난화 현상이 추가된 건 분명하다.

일반적인 전쟁은 적군과 아군이 맞붙어 싸우다가 결국 승자가 가려진다. 하지만 노르트스트림 파괴는 다르다. 적군과 아군 모두 패자다. 메탄은 국경을 가리지 않고 퍼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삶까지 공격한다. 메탄으로 가속화된 지구온난화의 결과는 현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도 감당해야 한다.

노르트스트림을 부순 세력은 가스 공급 중단이라는 전략적 목표에만 집중했을 뿐, 온난화 심화라는 환경 문제는 생각도 안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겠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자기파괴적인 태도는 더 이상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면서까지 쟁취해야 할 승리 같은 건 없다.

<이정호 산업부 차장 run@kyunghyang.com>

 

 

연재 | 기자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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