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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폭탄과 크고 작은 부비트랩이 곳곳에 설치된 공장.’

2014년 6월 해체 작업이 진행되던 일본 후쿠이현 후겐원전 내부를 돌아보면서 든 느낌이었다. 2008년부터 해체를 시작한 이 원전의 내부는 배관, 펌프 등이 얽히고설킨 채 ‘문을 닫은 공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당시 원전 내부를 보며 시한폭탄과 부비트랩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 까닭은 원전이 운영과 해체 과정에서 반드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즉 핵연료봉이라는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위험성으로 세계 대부분 국가가 처분시설을 어디에 만들지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는 핵연료봉이 시한폭탄이라면, 다소 위험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형태와 구조가 제각각인 탓에 다양한 해체기술이 필요한 중저준위 폐기물은 언제 어디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모르는 부비트랩을 연상케 했다. 중저준위 폐기물은 폐필터나 폐수지, 폐농축액 등 핵연료봉보다는 오염 정도가 낮은 폐기물을 말한다.

8년여가 지난 현재 돌아본 ‘시한폭탄과 부비트랩이 가득한 공장’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비유였다. 핵연료봉이 시한폭탄 같은 성격을 지녔다는 점은 달라진 바가 없다. 틀린 부분은 중저준위 폐기물 역시 비슷한 상태라는 점과 그 위험성이 좁은 공간에서 제한적인 살상력을 발휘하는 부비트랩에 비유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원전 폐기물 실태는 흔히 비유되는 ‘화장실 없는 아파트’가 안이한 표현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이동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수원에서 제출받은 보고서를 보면 국내 원전들에는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분장으로 가지 못하고 임시저장 중인 중저준위 폐기물이 다량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빛원전과 한울원전은 이미 저장시설의 포화율이 100%를 넘어섰는데 고리 1호기를 포함한 노후 원전들의 해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경우 상황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특히 한수원 보고서에 따르면 중저준위 폐기물을 더 저장할 공간이 없으면 원전 가동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중저준위 폐기물 역시 원전의 안전한 이용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경향신문 보도 전까지 이 같은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탓에 원자력발전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키려는 환경부의 시도에서 중저준위 폐기물 실태에 대한 고려는 이뤄지지 못했다.

게다가 한수원은 국감에서 이 의원이 질의한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원전별 해체 추진 일정에 따라 해체폐기물 처리시설 확보를 준비 중”이며 “폐기물 처분을 위해 처리기술 개발 및 인프라 확보를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 원전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50여년이나 지났지만 고준위 폐기물은커녕 중저준위 폐기물조차 처리할 장소와 기술을 갖추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원전은 화장실이 없을 뿐 아니라 시한폭탄까지 품은 아파트라는 점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원전을 무리하게 친환경으로 규정하고, 노후 원전을 계속 가동하려는 정부의 근시안적 태도가 지극히 우려스럽다.

<김기범 정책사회부 차장 holjjak@kyunghyang.com>

 

 

연재 | 기자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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