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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품격>을 썼지만 행복한 사람이군요?” 스태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패널로 출연 중인 한 방송사 프로그램의 그날 주제는 ‘행복’이었다. 사전에 패널들의 행복지수를 알아봤고 내 점수는 꽤 높은 편이었는데, 그게 뜻밖이었나 보다. ‘불만’이라는 단어가 행복과 거리 먼 말맛을 가졌음을 새삼 곱씹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면 숱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여물어 바구니 같은 것에 소복이 쌓여있는 모양을 상상하게 된다. 그 ‘추억방울’들이 아름다운 색채이길 바라며 이를 위해 힘쓴다. 노을 지는 풍경, 향기로운 바람, 부드러운 촉감, 신선한 재료로 만든 식감 좋은 음식 등 좋은 기분을 갖게 해주는 것과 접촉하고, 안전하게 외부와 분리된 감각을 주며 먹고 씻고 잘 수 있는 ‘나만의 방’을 확보하고, 반복적 스트레스와 고통의 요인은 치워버리려 노력한다.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고, 때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지인과 친구의 존재도 소중하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행복을 지키기 어렵다. 사회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직 생존경쟁만이 있는 곳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논리와 이성,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여유, 윤리적 성찰 따위는 사치로 느껴지고, 오직 살아남는 데 온 정신과 역량이 집중되기에 서로에게 잔인하게, 또는 무신경하게 상처 입히는 순간이 잦다. 어떻게든 피하고자 노력해봤자 도처에 널렸기에 지뢰 밟듯 폭탄을 터뜨리거나 그 파편에 상처입기 십상이다. 너무나 사회에 불만이 없고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경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자.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학습한 규범이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추석을 비롯한 명절은 전국적으로 이런 일이 창궐하는 때다. 주로 결혼, 출산, 육아와 관련해 “그 나이에는 당연히 뭐뭐 해야 하지 않냐”는 압력들이다. 나이뿐 아니라 성별, 학력,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과 억압도 횡행한다. 각자 성장환경과 삶의 조건이 다르고 형성된 정체성과 지향성도 다른데, 자기답게 사는 게 제일 속 편하고 좋을 텐데 왜 하나의 사회규범을 들이대는 걸까?

하나의 기준만 있다 생각하고, 모두가 그 기준을 따라야 한다 믿으며 스스로와 타인을 그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 대화의 뒷맛을 쓰게 한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속성이었다. 나란 존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묻는 게 아닌, 규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음을 열심히 답해준 뒤에야 알게 될 때가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로 줄 세워 급 따지며 차별하고, 몇 가지 단어로 사람을 납작하게 규정해 떠들어대는 이들에게 많은 정보를 줬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꺼림칙한 느낌을 남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아닐지 돌아보게 했다.

서열 매기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 중 몇몇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기본 권리가 주어지는 일에 내심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보편적 복지를 한사코 거부하는 정책 입안자나 행정가들도 혹시 그럴까봐 걱정이다.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이탈한 이들은 불안감과 모멸감을 견디는 일상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까봐.

그렇게나 서열을 좋아하시니 그와 같은 결로 말해보자. 한국 정도 경제규모의 ‘선진국’에서 개인이 연거푸 불운을 겪으면 홈리스가 되기 쉽다는 것, 가정 내 중증 환자가 있으면 풍비박산을 불러오는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부끄러울 일이다. 자원이 불합리하게 나뉘고 있는 지금 현실은 분명 개선될 여지가 있다.

올해도 추석연휴가 끝나자 ‘시달린 자’들의 증언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화, 정책, 일상의 정치까지 아우르는 사회적 불만이다. 이런 불만들이 사회를 개선하는 자료가 되기를, 변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일상을 불안 없이 지킬 수 있기를.

또한 불만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이제 거둬주시길 바란다. 사회에 불만을 제기하는 실천과 개인의 행복을 챙기는 일상은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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